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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역사

정혜거사 2019. 2. 12. 22:03

>> 인도의 역사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하는 인더스 문명과 함께 시작하였다.
인더스 문명의주인공은 드라비다족으로 보는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단정할수는 없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에서 기원전1500년 사이에 발전하였던 문명으로, 이집트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조금 늦게발달하였다. 



인더스 문명은 단순히 인더스강 주변지역이 아니라 가하하크라 강 유역까지포함하는 폭과 길이가 모두1,000km가 넘는 매우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서 발달하였다.



유적지들은 지점마다 멀리 산재해 있는데 하라파와 모헨조다로(Mohenzodaro)간의거리만 600km정도 떨어져 있다.


또한 모헨조다로의 동쪽 40km의 코트디지 유적과 델리의 서쪽 270km의 칼리방간 유적이발굴되어, 인더스 문명 직전의문화가 밝혀졌다.칼리방간과 암리의 유적은 하라파(Harappa)보다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트디지 유적에서는 인더스문명에 속하는 4층의 밑에 12층에 이르는 코트디지문화의 층이 있으며, 견고한 요새를 가진 작은 도시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발굴된 어느 유적에서도 철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인더스 문명은 청동기 문명으로 보고 있다.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모헨조다로나 하라파의유적은 BC 2500년경의 것으로정교한 도시계획을 가진 도시문명의 흔적을 보여준다.


 

양자는 모두 동일한 도시계획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인더스문명의 유물인 채도, 금은 세공품, 구리, 청동제식기등의 분포로 미루어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교역을하고 있었으며 멀리 나일강 유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가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인장처럼생긴 유물은 동일한 모양의 유물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도많이 발견되어 이를 뒷밭침하고 있으며, 인장에 등장하는악어, 코뿔소, 물소 등의 동물로 미루어 보아 오늘날보다는습하고 숲이 우거진 환경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들이 목화를 옷감으로 사용한 것으로보아 최초의 목화 재배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신앙생활을 위한 성채가 마련되어있고, 여러 동물이 그려져 있어 자연물 숭배의 흔적도 보인다.


 

그런데 시바신의 원형으로추정되는 삼면신(여신상)이 발견되었으며, 수많은 동물에 둘러싸여 요가의 자세를 취하는수행자의 모습이 인장이나 돌위에 새겨놓은 그림에 나타나는 바, 오늘날의 인더스인의신앙인 힌두교와 깊은 관계가있다.



그런데,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던 인더스 문명은 그 갑작스런멸망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몰락의 원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게 추측된다.


 

천재지변인 홍수로 인해 강이 범람하면서 붕괴하였을 것이라는 설,고생물학적 연구에 따르면 과도한 경작과 삼림파괴로 인한환경의 변화로 붕괴하였다는설, 이후에 이 지역에 들어온아리안족과 같은 외적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는 설 등이있다.



인더스 문명의 멸망 이후에는이주해 온 아리아인들에 의해베다시대(Vedic Age)가 열린다.

카스피海와 남 러시아 늪지대에 살던 유목민 아리안족은 민족적 이동을 거듭하면서BC 1,500년 경에 인도 북부의펀잡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당시 이미 인도에 살고 있던드라비다족과 같은 선주민들과충돌하게 된다.전차와 철기문화를 가진 아리안족이 인도의 북서부를 차지하면서 베다시대가 시작되고청동기 문화를 가진 선주민들은 인도남부로 밀려났다.


BC1,500년에서 BC600년 까지의 베다시대는

 

인더스와 펀잡지역에서 델리까지 확장해나가는 BC 1,000년까지의 전기베다시대와, 동진을 계속하여 선주민의 문화와 융합이 일어나는 후기베다시대로 구분된다.



베다는 종교문헌으로 주요 부분인 신에 대한 찬가와 기도문뿐만 아니라 철학, 문학, 사회생활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담고 있다.


                

전기 베다시대(BC1,500~1,000)에는


소의 숭배사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인도 사회의 가장중요한 부분의 하나인 카스트제도가 등장하는 시기이다. 가부장적 사회였던 아리아인들의사회는 정복민과 피정복민의구분이 생기고, 


종교의식을 관장하는 사제집단인 브라만,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계급과 군인집단인 크샤트리아, 

농 - 공- 상업을 담당하는 바이샤 계급으로 계급적 분화가 일어나면서 카스트제도의 초기모습이나타난다.


후기베다시대(BC1,000~600)는 인도의 철학적 관심, 종교적 열망 등과 관련된 사상적기저가 제시되어 있는우파니샤드(Upanisad)로 대표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윤회, 업(Karma), 법(Dharma),브라만(우주의 본체), 아트만(인간의 영혼)과 같이 이후의인도종교철학에서의 주요한 개념들이 형성되며,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카스트제도가 확립되었다.


특히 우파니샤드는 종교적 제의중심의 종교보다 인간이 자아성찰에 의해 해탈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의 종교철학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BC 6~5세기에불교의 출현으로 꽃을 피우게되었는데, 브라만의 제의 중심적 전통 또는 종교와 사상의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베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크샤트리아들에 의해 선호되었다.



베다시대에는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들이 농업적으로 정착하였고, 후기베다시대부터는 여러개의 소왕국들이 나타났고 전쟁이 빈번하였다.BC 6~5세기경 베다시대의 말기가 되면 브라만(Brahman)중심의 부족사회에 변화가 나타난다.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의확고했던 지배력이 약화되는반면, 전쟁을 통해 힘을 축적한 크사트리야(Kshatriya)의제식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왕권을 바탕으로 하는 왕권국가들을 만든다. 또한 활발한 상업활동을 통해 사회, 경제, 사상적 변화가 일어난다.



한편으로 붓다가 태어난 카필라와 같은 부족중심의 도시국가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마가다(Maghada), 코살라(Kosala)와 같은 군주가 중심이 된 강력한 왕권국가들이 등장하고,


다른 한편으로 브라만 중심의베다에 근원을 둔 종교나 사상에서 벗어나 불교와 같은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여 사문(沙門)이라 부르는 신흥 사상가내지 신흥 종교집단들이 등장하게 된다.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라자그리하(Rajagrha)와 같은 왕권국가의 도시들은 다양한 사상과 수행자들의 집합처가 되고 새로운 철학과 사상이 풍요롭게 발전하여 인도의 사상적 황금기가 된다.



BC 5세기 경이 되면 ,


마가다나코살라와 같은 왕권국가들은정복전쟁을 통하여 인도 전체의 통일국가를 지향하게 된다.갠지즈 평원의 높은 농업적 생산력, 갠지즈강의 편리한 수운을 이용한 교역을 통해 급성장한 마가다국은 빔비사라(Bimbisara)왕때부터 팽창정책을 폈고 유럽의 그리이스인들의 기록에도 강력한 국가로 등장한다.



러나 BC 4세기 중엽 이후난다(Nanda) 왕조에 의해 멸망되며, BC 327년에 알렉산더대왕의 침입을 받아 인더스 유역의 작은 왕국들이 복속된다.BC 323년 알렉산더가 죽자 혼란한 틈을 타서 찬드라 굽타모리야는 북서 인도를 지배하던 알렉산더의 군대를 격파하여 펀잡지방을 차지하고, 난다를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마우리야 왕조를 창설하였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북서 인도를 평정, 동부 영역을 지배하던 셀레우코스가 남하하였으나 찬드라굽타의 대군에 눌려,500마리의 코끼리와 교환하는조건으로 전 그리스령을 넘겨주고 돌아갔다.



찬드라굽타는 북쪽으로는 히말라야산맥에 이르고, 동쪽으로는벵갈만에 이르고 서쪽으는 아프카니스탄에 이르는 인더스강과 갠지스강을 잇는 북인도 대부분을 차지하였는데, 기록에의하면 각 부처는 정비된 행정체제를 갖추었고 보병 60만,기병 3만, 코끼리 9천마리의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아쇼카왕(BC 269~232) 때는 


수많은정복전쟁을 벌여 마침내 남인도의 칼링가 왕국을 정복함으로써 타밀지방을 제외한 전 인도에 걸친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을 이루었다.이 시기가 마우리아 왕조의 최전성기였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완성되었다.



그는 왕위계승과 정복전쟁에서수많은 살생을 한 것에 대해회의를 느껴 불교에 귀의하면서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고 불교의 해외전파에도 앞장섰다.



그가 인도의 이상적인 군주인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불리울 만큼 불교의 법에 의한 정치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것은, 희생물에 의해 제사를 중시하는 브라만 세력들을 약화시키고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가 전파한불교는 동남아시아의 소승불교의 기원이 되었으며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시키는 데공헌하였다.


그러나 아쇼카왕 사후 50년이지나 마우리야 왕조는 BC 185년에 브라만 계급 출신의 푸쉬야미트라(Pushamitra)에 의해멸망된다.



이후 인도는 BC 2세기에서AD 3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여러 왕조가 난립하는 혼란기를 겪는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는 아쇼카 사후에 널리 퍼진불교가 융성함과 동시에 브라만 중심의 브라만교가 민중적요소를 흡수하면서 인도 특유의 힌두교가 성립되고, 쿠샨왕조에 의해 동서문화의 교류가활발하게 일어나 동서 문화융합이 일어났다.



북인도의 서북지역은 박트리아(Bactria), 샤카(Sakya)가 연속하여 지배하였으며 이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쿠샨 족이 박트리아를 정복한 뒤 인도의 간다라 지역을 지배하였다.



쿠샨왕조의 카드페세스 2세 때는

 

인더스 강하구에서 힌두쿠쉬 산맥 지역까지 차지함으로써 홍해와 지중해 세계, 인도세계가 연결되는 거대한 해상및 육상 통상로를 확보하여 동서간의 교류가 촉진되었다.



쿠샨왕조의 왕들은 인도, 이란,중국, 로마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호칭들을 사용하였는데 이들의 포용적 성격을 잘 보여주며, 동서문화의 융합의 결과로써 그리이스 로마 계통의 미술과 인도의 불교미술이 혼합간다라 미술이 나타난다.



이시기 불교는 왕족과 상공업자의 지원을 받아 대승불교로 발전해 나갔으며, 카스트제도에따른 4개 계급의 종교적 의무와 생활규범들을 규정한 <마누법전>이 브라만에 의해 편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브라만이 중심이 되는브라만교의 전유물이었던 베다성전에서 볼 수 없었던, 

쉬바신1)이나 비쉬누 신2)이 나타나고, 

1) 쉬바 신

우주의 파괴를 관장한다. 파괴는 창조로 이어진다는 힌두적 관념 때문에 쉬바는 또한생산, 생식의 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면이 전 인도에 전파됨에 따라서 쉬바는 요니(여자의 생식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곧 생식 행위의 직접적인 상징이지만, 여기서 음란하다든가 하는 따위의 인상은 전혀 받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생명의 풍요로움이 밝고 대범하게 표상되어 있는 것이다.

2) 비쉬누 신:

 쉬바와 마찬가지로 아리아인의 신관(神觀)과 원주민 부족의 토착신이 융합되어 발전한 신이다. 비쉬누 신의 보급과 화신사상은매우 밀착되어 있다. 사람들은 전설이나 실재하는 영웅, 위인을 비쉬누의 화신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보편성을 호소해 왔다. 

비쉬누의 화신중에서 크리쉬나는 가장 중요하다. 갖가지 전설이통합되어서 들어진 크리쉬나 신화가 완성된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지만, 그 중에서 그는 피리를 불어 여성을 매혹시켰다고 한다. 

그리하여크리쉬나는 애비(愛妃) 라다나외에 여인들과 노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12세기 이후에는 바크티신앙의 기반위에서 사람들을 에로스적 신비 사상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비쉬누의 화신은 보통 열을 헤아리는데, 그 아홉 번째가 불타이며, 일곱 번째를 라마로 여긴다. 비쉬누 신은 어깨가넷으로써 그 네 개의 팔에는 각각 연꽃, 곤봉,법라패(法螺貝), 윤보(輪寶)를 들고, 그의 아내라크쉬미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갠지스 강이나 히말라야산의 신격화가 일어나고, 서사시로 된 대중적인 종교문헌인<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가등장하면서, 민간신앙과의 결합을 통하여 힌두교가 성립되었다.



쿠샨(Kushan)왕조가 쇠퇴하면서 북동 d인도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AD 3세기 중엽찬드라 굽타 1세는 오늘날의비하르 주에 해당하는 마가다지역에서 굽타왕조를 건설하였다. 



 찬드라 굽타 1세는 13개의군소왕국을 굴복시켜 북인도의광범위한 지역을 병합하였는데,정복지역의 왕들에게 자치권을부여하여 통치하였다.



그의 아들 사무드라 굽타도 갠지스 강상류와 그 이남지역까지 정복하였으며, 3대왕인 찬드라 굽타 2세는 정략혼인을 통하여동맹체제를 만들면서 영토확장을 계속하여 전인도를 거의 통일, 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특히 서인도의 항구들을 차지함으로써 지중해 무역까지 참여하는 등 유럽지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굽타(Gupta)시대에는,



도시가 번창하고 부유한 시민들의 생활은 사치스럽고 우아했다. 굽타시대(320년부터 550년경까지)는 힌두의 르레상스시대라고 할 만큼 힌두교와 힌두문화가 매우 중시되었다.


 

굽타시대의 여러 왕들과 지방 영주들은 대부분 힌두교의 신인비쉬뉴의 신자였지만, 북인도에서는 주로 비슈누 신을 숭배하고 남인도에서는 주로 시바 신을 숭배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적인 고유문화를찾는 복고적 기운이 나타나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드러나는가운데 힌두교, 불교 등의 종교와 관련된 작품 뿐만 아니라세속적인 문학작품들도 등장하였으며 이들 작품은 브라만 계층에서만 사용되던 산스크리트어로 만들어졌다.



역사적 사실과 전설을 담은 <푸르나>가 등장하고 희곡, 시, 전기문학 등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나타났으며, 힌두사원과 비슈누 신을 비롯한 힌두교 신들의 부조와 이들을 모시는 건축물들이점차로 증가하고 규모가 커졌다



.한편 굽타왕조 시대(320~550)에는,


힌두문화가 다양한 외래문화와 섞이면서 문학, 예술,과학, 종교 등 다방면의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인도적인 민족적 색체가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힌두문화는 국내에그치지 않고 해외의 수마트라,자바, 보르네오 등지에까지 급속하게 전파되었다. 3세기 이후 로마와의 무역이 점차 쇠퇴하면서 인도상인들은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에 힘을 쏟았으며중국까지 항해하였다.



이 시기에 불교는 힌두교의 발전으로 대비되었지만 인도전역에 걸쳐서 불상, 사원들이 지어졌는데 아잔타 석굴과 같은걸작을 남겼다. 



그리고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배우는 날란다 사원이나 무역으로 번창하여 불교, 힌두교, 기타 종교의사원이 즐비하였던 왈라비와같은 곳은 종교관련 학술연구의 중심이었다. 



당시의 왕들은힌두교의 신을 숭배하면서도불교사원에 대한 적극적인 희사도 이루어져 불교와 힌두교는 공존하였다.5세기 경에는 훈족의 침입으로굽타왕조는 쇠퇴의 길을 걸어6세기 경에는 마가다 지방만을통치하게 되었다.



북인도는7~8세기에는,


갠지스 강 유역의 마우카리 왕조, 델리 북쪽의 푸수파부티 왕조, 수라스트라 지방의 마이트라카 왕조,데칸북부의 와타타카 왕조, 동인도와 벵갈을 지배한 팔라 왕조 등 여러 지방 왕조가 등장하였다.



남인도의 경우도 통일왕조를이룬 팔라와 왕조를 비롯하여찰루끼야 왕조, 라슈쿠라쿠타왕조 등 여러 왕조가 차례로번성하였다.



특히 남인도의 타밀지방은 독자적인 힌두문화를발전시켰다. 이 지방의 팔라와왕조는 시바신을 숭배하는 힌두교와 산스크리트 어를 권장하였는데 해안에 인접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를 통하여 동남아시아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성장으로 이슬람교의 전파가 인도에다다른 것은 7세기 무렵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슬람의침입과 이슬람왕조의 성립은11세기 이후의 일이다.


 

아프카니스탄에 근거를 둔 가즈나 왕조(Ghaznavid dynasty)가 펀잡을 비롯한 북인도와 아라비아해 연안까지 원정을 하여 약탈과 파괴를 하더니, 가즈니 왕조를 멸망시킨 터어키계의 구르 왕조(Ghur dynasty)가 다시펀잡과 갠지즈 평원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구르왕조의 시하붓딘은 인도깊숙히 침입하여 1192년에 힌두 연합군을 패배시킴으로써인도의 무슬림 지배가 시작되었다.



10세기말 작은 도시로만들어진 델리는 무굴제국이세워지고 300년(1526~1857)동안 인도 무슬림 왕국의 수도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 초의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노예왕조(1206 ~1298)가 탄생하였는데, 인도를정복한 구르왕조의 시하붓딘의부하였던 아이박은 시하붓딘이세상을 떠난 후, 왕조의 분열로 독자적인 왕조를 세운 것이다. 



그가 노예출신이어서 노예왕조라고도 하고 델리의 술탄왕조(1206~1298)라고도 하였으며 통치방식은 이슬람 전제군주제였다.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여 이슬람 사원을 세우고힌두인들에게는 인두세를 매겼다.이 시기에는 서아시아(중동)적요소가 유입되어 종교, 예술등에 영향을 주었는데, 힌두교를 완전히 변화시키지는 못하였지만 힌두교인을 무슬림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후에는 노예왕조의 혼란을틈타 왕권경쟁에서 승리한킬지파가 세운 킬지왕조(1290~1320)를 비롯하여,투크라크 왕조(1320~1423),세여드왕조(1414~1451),로디왕조(1451~1526)으로여러 이슬람 왕조가 이어졌다.



한편 북부인도의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남부인도에는 위자야나가라 왕조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이슬람 세력이 남인도로 팽창하는것을 막았다.



1526년에 몽고제국 티무르의5대손이며 아프카니스탄의 토호세력이었던 바부르(무굴제국의 1대 황제:1482.2.15~ 1530.12.26) 는대포와 같은 화기를 사용하는새로운 전쟁기법으로 인도를침략하여 아그라를 수도로 하고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제국의 3대손 악바르(1542~ 1605)는,


종전의 이슬람 지배자와 다르게 힌두에게 종교적 관용과 화해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힌두인들에게 부과된 인두세를철폐하였다. 


왕위에 오를 때는남인도의 위자야나가라왕조나북인도의 무슬림 왕국에 비해열세였지만, 자신이 힌도교를믿는 라지푸트 제왕조의 공주와 결혼하는 일련의 개혁정치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군사력을 바탕으로 데칸고원의남쪽을 제외한 인도대륙 대부분과 아프카니스탄에 이르는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악바르의 사후 왕위를 계승한4대 황제 자항기르(Jahangir)는악바르의 유업을 계승하여 영토확장 정책을 계속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귀족출신의 누르자한(Nur Jahan)과 결혼함으로써 페르시아 풍의 예술과 문화가 성행하여 인도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1608년에 영국상인들에게 수라트(Surat)에동인도 회사의 설립을 허락함으로써 영국세력의 인도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자항기르의 아들인샤자한(Shah Ja han: 1592.1.5~ 1666.1.22)은 반란을 거듭하다 결국 왕위에 올라 영토확장에 착수하여 악바르 시대보다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타지마할을 비롯하여 델리성, 자마마스지도, 아그라성(Agra fort)등 무갈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건설하였다.



샤 자한의 아들인 아우랑제브(1618.11.3~1707.3.3)는 아버지를 유폐하고 왕위에 오른 뒤힌두사원을 파괴하고 힌두교도들에게 인두세를 부활시키는등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영토 확장 정책을 폈다. 


그러나 과도한 영토확장정책과 이슬람화 정책은 국력을 소진시키고 힌두교도들의불만을 야기시켰다.

무굴제국에반대하고 힌두전통이 강한 데칸의 마하슈트라 지역의 마라타족이 쉬와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효과적으로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엄청난 희생을 유발시켜 국가재정의 고갈을 가져왔다.


 

이러한무굴제국에 저항하는 세력은라지푸트족, 마라타족, 그리고시크교도 들까지 늘어나고 왕권경쟁으로 내분을 겪으면서무굴제국은 아우랑제브 이후쇠퇴의 길을 걸었다.



1526년 성립된 무굴제국은인도 최초의 민족항쟁이었던세포이의 항쟁(1857~1859)3)을계기로 1857년 멸망하고 인도전역이 영국의 직할 식민지로편입된다. 


이미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시대에 영국은 1600년 동인도회사를 처음으로 열고 차례로 무역공관을 세운 뒤1686년 무력으로 후글리를 점령하여 인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으나 큰 패배를 한 경험을가지고 있었다.



이후 영국은사과 사절단을 보내어 다시 무역허가를 받아 콜카타(캘커타),뭄바이(봄베이) 등에 거점을 두고 인도에 진출하였으며, 무굴제국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인도의 식민지화 계획을 조금씩 추진해 나갔다.프랑스 또한 1664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인도에 진출하고 있었다. 



1742년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에서 전쟁을 벌이자 인도에 있던 양국의 동인도회사 간에도 충돌이 발생하여몇 차례의 전쟁이 발생했다.영국은 벵갈을 차지하기 위해1757년 플랏시 전투에서 프랑스에 승리함으로써 프랑스 세력을 인도에서 몰아내었다.



18세기에는 무굴제국의 쇠퇴로많은 토후 세력들이 등장하여여러 곳에서 인도전체의 지배를 노리는 영국과 충돌하였지만, 영국의 분열정책으로 대부분 영국세력에 병합되었다.


 

19세기 중반 영국은 인도전체를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며 영국우월주의 아래에 완전한 식민지 작업에 착수하였지만 영국의 지배가 노골화될수록 반영항쟁은 격해졌다.


1857년의 벵갈에서 시작하여전 인도로 번진 세포이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종교적 자유의 보장과 함께 비인격적인 식민지 정책은 부분적으로 완화되었다.


 

이때부터 동인도회사의 통치권은 회수되었고 영국정부에 의한 인도의 직접통치가 이루어졌다.영국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서양사상에 자극을 받은 인도의지식인들은 각종 종교적, 사회적 개혁운동을 전개하였으며,이러한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885년에 창립된 인도국민회의는 민족주의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초기에는영국정부에 건의하는 소극적인방법을 사용하였으나 1905년커즌(George NathanielCurzon, 1859.1.11 ~1925.3.20) 총독의 반동정책으로 민족주의 운동은 급진적으로 변해갔다.


 

그가 민족의식이높고 반영운동의 중심지인 벵갈지방의 분할안을 내놓자, 인도인들은 영국상품 불매운동을전개하는 등 반영운동을 전개하였다.



20년 이상 비폭력 저항운동을전개하였던 인도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1869.10.2~1948.1.30)는,


1920년대 초인도국가의회당(IndianNational Congerss Party)을영국 식민정치에 대항하는 대중적 운동으로 전환하였다.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면서 더욱 강경한 식민정책을 실시하였다.



강력한 인도인 억압정책을 담은 로울타트법이 1919년에 책정되자, 간디는 불복종운동과 전국파업을선포하였다. 


그러나 시민 불복종 운동의 실패 후 국민회의의전면에서 퇴진한 간디는 영국군의 인도철수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었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연방제를 골격으로 하는 인도의 독립과 권력이양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반영운동을 주도하던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간의 합의가 실패로 끝나고 대규모 무력충돌이 일어나자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 독립하였다. 



즉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의 반목이 영국으로 하여금 인도를 분열하게 하여 이슬람교인이 대부분인 동∙서 파키스탄이 탄생하였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영국연방 중에서 주권국가가 되었고 초대총리는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1889.11.14 ~ 1964.5.27 ) 가되었다. 인도는 1950년 1월 26일 새로운 헌법을 공포한 후에영국연방 안에서 공화국이 되었다.



독립 이후 간디와 네루의 의회당은 네루의 영향력 아래 인도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후에는 네루의 딸(인디라 간디)과 손자(라지브 간디)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인도를 통치하였다. 



총리인 네루는그가 사망한 1964년까지 인도를 통치하였다.이후 샤스트리(Shastri)에게 권력이 넘어갔다가 1966년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이양되었다.



네루의 무남독녀 인디라 간디(1917. 11.19 ~ 1984.10.31)는1966년부터 1977년까지 인도를 통치하였다. 1975년 심각한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에 둘러싸이게 된 간디 여사는 국가의위기 상황을 선포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그녀의정책을 국민들이 따라주기 바라며 1977년 선거를 실시하였으나 데자이(Desai)가 이끄는5개 야당의 혼합인 자나타당(Janata Party)이 승리하였다.1979년 데자이 정부는 붕괴하였다. 이후 싱(Singh)이 임시정부를 형성하였으나 권력은 다시 1980년 1월 간디 여사에게이양되었다.



1984년 10월 간디여사는 암살되었으며 그녀의아들 라지브 간디가 국민의회당에 의해 그녀의 자리를 계승받았다. 그의 정부는 1989년부패혐의에 의해 붕괴되었으며셰크하르(Shekhar)에게 정권이이양되었다.



1989년 야당의 연합인 자나타달(Janata Dal)은 라지브 간디(1944.8.20 ~ 1991.5.21) 의국민의회당에 승리를 거두었다.



1991년 5월27일 라지브 간디는 타밀나두 지역에서 선거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하였다. 이는 스리랑카의 타밀 극렬주의자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다시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한 국민의회당이 213석의 의석을 차지하였으며 라오(Rao)의 지도력아래 다시 권력을 잡았다.



라오는 30년 만에 간디나 네루가계의 출신이 아닌 첫번째 국민의회당 출신 총리가 되었으며 5년의 임기를 모두 채웠다.



이 시기는 인도가 경제적으로점차 자유화되고 개혁하는 과정이었으며 세계로 인도의 경제를 개방하는 시기였다. 인도의 국내정치는 새로운 형태를띠게 되었는데 각 계급, 종교,민족 단체들의 지역적, 정치적인 소규모 정당들이 난립하였다.



라오가 이끄는 정부의 임기 마지막해인 1996년 봄, 몇 가지정치적 부패 스캔들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역사상 국민회의당에 의해 치러진 최악의 선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연정체제가 성립되었으나1998년의 선거를 통하여 국민회의당은 참패하면서 BJP(Bharatiyu Jauapa Party) 중심의 연정이 이루어져 바지파이(Vajpayee) 총리가 등장하였다.



1998년의 선거에서 참패한 국민회의당은 피살된 인디라 간디의 며느리이며 라지브 간디총리의 아내인 소냐 간디를 당수로 내세웠다.



2004년 5월(~2010년 현재까지)의 선거에서 국민회의당 중심의 연합정당이 승리를 거두면서 소냐 간디(1946.12.9.~)는 재차 당수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연정을 이룬 만모한 싱(Manmohan Singh) 을총리로 지명하며 인도의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할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인도는 싱 총리의주도하에 급속한 경제성장을이루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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