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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기르(王舍城) / 나란다 대학

정혜거사 2019. 2. 12. 22:22

라즈기르(王舍城)  / 나란다 대학

- 영취산, 칠엽굴, 죽림정사,빔비사라왕 감옥-

 

① 라즈기르(왕사성)

강대한 북인도의 군주국가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즈기르(왕사성)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꽃피우던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고장이다.



                      <  라즈기르 거리 >



②  라즈기르에 얽힌부처님 이야기


 ♣ 빔비사라왕의 귀의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왕은 그 수행자의 자태가 거룩해 보여 공주와 결혼하여 이 나라를 같이 다스리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거절하자 이번에는이 나라의 반을 주겠다고도 하고 혹은 군대를 줄 테니 이웃나라를 쳐서 영토를 확보하여통치하라고 제안하는 등 갖가지로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출가의 목적은 모든 중생의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일 뿐 욕락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그 청을 거절한다.


부처님은 이 곳에서 아라라 까라마 스승을 만나 무소유처의 선정 삼매에 도달하였으나 열반의 길이 아님을 알고 스승곁을 떠난다. 


다시 웃타카 라마푸투라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며 비상비비상처의 선정 삼매에 도달 하였으나 이것 역시 세상 고통의 해결 방안이 아님을 알고 떠난다.


부처님은 성도후 보드가야로 부터 천명의 비구를 이끌고 한사람이 움직이듯 정적 속에 왕사성으로 돌아오셨다.

성문 밖 16km 지점에 부처님이 이르렀을 때 그 소문을 듣고 빔바사라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부처님이 아닌 우루벨라 가섭한테 공양을 올리며, ‘우루벨라 가섭이여,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칠십 먹은 노인을 보고  이 사람이 내 손자요 하는 것은 믿을 수 있지만, 당신이 어떤 젊은 수행자에게 귀의했다는 그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우루벨라 가섭은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 무릎 꿇고절을 하면서  ‘이 분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이 분의 제자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리고 ‘제가 이 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분을 만나고 나서는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라고 하자 빔비사라왕은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고부처님께 절을 하고 법을 청한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시자 빔비시라 왕은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이렇게말했다. ‘내 평생에 다섯 가지소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내가 왕이 되는 것이요,

두 번째는 부처님이 내 나라에 출현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내가 그 부처님을 만나뵙는 것이요,

네 번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닫는 것이요,

다섯 번째는 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그런데 저는 오늘 모든 소원을다 성취했습니다.

부디 부처님께서는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왕궁으로 초청하나 부처님께서는 거절하셨다. 

                                                                                                                           < 빔비사라왕 감옥터에서 경행 >

 

부처님께서는 걸식만을 하시었고,궁성 출입을 안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빔비시라왕은 왕궁에서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왕궁밖에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대나무 숲을 부처님께 기증하게 된다.

이것이 불교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이며,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그 곳에 머물면서 정진하며 교화활동을 시작한다.

 

③ 영취산(靈鷲山)7)


영취산(독수리봉)은 왕사성 찻타 언덕의 남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이 봉우리는 산기슭에서올려다 보았을 때,  정상에 있는 검은 바위가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접은 채 쉬고 있는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에 독수리봉이라고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기바의 망고원 옆을 지나,  그  옛날 빔비사라왕도 수레에서 내려 걸어 올라 갔다는 길을 따라가면 커다란 암석이 앞을 가로막는데, 좀 더 가서 닿는 정상은 약간 평탄하고 벽돌로 쌓은 조그마한 터가 남아 있다고한다. 


여기에서 부처님의 초전법륜상, 과거 7불, 미륵보살상,인장(印章)등이 출토되었다.

현장법사는 이 봉우리를 취봉(鷲峰), 취대(鷲臺)등으로 부르고, " 독수리가 둥지를 틀고 살며, 높은 곳에서 하늘과 비취색이 서로 비춰 짙고 옅은 빛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기술하고 있다. 



또한 빔비사라왕이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이봉우리에 계단을 만들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취산의 정상에서는 마가다국의 국왕 빔비사라왕이 만년에아들 아사세왕에 의해 유폐되어 있었던 이른바 빔비사라왕감옥이 서쪽 멀리 바라보인다.빔비사라왕과 그의 아내 위제희부인의 이야기는 후대의 대승경전에서 '왕사성의 비극'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④ 칠엽굴_제1결집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장함으로 해서 여러 가지로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다.



이것을 보고 가섭존자는 세월이 흐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자기 식대로 해석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아라한과를 증득한 장로 500명을 칠엽굴에 모아놓고, 늘 부처님 곁에서 시봉했던 아난존자가 경의 초안자가되고, 우팔리존자가 율의 초안자가 되어서 부처님의 말씀을 읊었다.


 

그러면 부처님으로부터직접 들은 다른 대중들이 그것을 하나하나 검증하여 부처님이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여, 이곳에서 확인된 것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기로 했다.이렇게 경율이 편집된 것을 결집이라고 한다.



이 당시에도이 경들은 글로 남긴 것이 아니라 암송하여 전하여졌기 때문에, 초기 경전인 아함경을보면 대부분 싯귀로 내용이 축약되어 있다.



아난존자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암송할 때 너무 부처님의 목소리와 흡사하였기때문에, 모든 대중들은 ‘부처님이 살아오셨는가? 



타방에 계시는 부처님이 오셨는가? 아난존자가 부처가 되었는가? 이런세 가지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경전은 시작할 때 반드시 부처님이 하신말씀인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육성취8)를 지키고 있다.

예를 들면 금강경 첫 구절을보면 如是는 믿음이 성취된 것이고 我聞은 들음이 성취된 것



 - 8) 육성취(六成就) : 신성취(信成就), 문성취(聞成就), 시성취(時成就), 주성취(主成就), 처성취(處成就), 중성취(衆成就)



이고 一時는 때가 성취된 것이고 佛은 설법주가 성취된 것이고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은 장소가 성취된 것이고 비구대중1250과 더불어 함께 하시니성취된 것이다.





⑤ 나란다대학

나란다대학은 1,500년전에 세워진 세계 최초, 최대의 불교대학이다.

또 부처님이 여러곳을 여행하시는 동안에 나란다의 파바리카 망고나무 동산에 머무시기도 했던 곳입니다.또한 이곳은 부처님의 제자인사리불과 목건련의 출생지이고열반지이다.



나란다라는 이름은 옛날 이곳호수에 나란다라고 불리우는 용이 살고 있어 그용의 이름을 따서 나란다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란다대학은 불교대학이지만 불교만 가르친 게 아니고, 힌두교라든지 다른 종교나 철학이나 수학 등 전 학문을 가르친 종합대학이었다. 



7세기경  현장법사가 이 곳에 왔을 때는 학생 수가 1만명, 선생이 천오백 명이었다고 한다.건물의 구조를 보면 한쪽으로 기숙사가 나열되어 있는데 방이 ‘ㅁ’자 모양으로 뺑 돌아가며 있고 가운데는 건물이 없다. 대부분 인도건물은 네모지게 짓고 복도가 안쪽으로 나있어 방의 문이 가운데를 향해 나있다.


 

이런 식으로 2층이나 3층을 올리고, 가운데는 우물이나 펌프가 있으며 하늘을 볼수 있게 짓는다.

이 곳에는 부엌과 식당으로 썼던 큰 건물이 있다. 그 당시에는 걸식을 했지만 많은 사람이함께 살기 때문에 걸식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기숙사안에는 선생을 위한 방에 침대가 하나 있고, 건너편에 가면  학생이 사용하던 방으로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수행자는  절대 방문을 잠그지 않는다.그래서 아예 문이 없고 나무막대기가 걸쳐있으면 들어오지 말란 뜻이고, 내려져 있으면 들어와도 좋다는 뜻이다.



겨울에는 춥지 않고, 여름에는 덥지 말라고 벽의 두께가 6피트로 아주 두껍다. 방안을 보면 촛불 켜는 구멍이 있고, 책을 넣는 책꽂이도 있다. 기숙사 안에는 부처님을 모신 사원과 상당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 건물에 가면 아래에 곡식창고와 우물이 있고, 형식은 거의 같다. 현재까지 바구된 것이 전체 규모의 한 10분의 1정도 된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였다는 걸 알 수 있다.

 

 ⑥  죽림정사 (竹林精舍)
 마가다국(magadha國)의 왕사성(王舍城)
에 있던 불교 최초의 사원으로 ,,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왕사성을 찾았을 때, 칼란다(kalanda)가 붓다에게 기증한 죽림 동산에 
빔비사라(bimbisāra) 왕이 지어 붓다에게 바친 정사이다.
 
이로써 이 죽림정사를 중심으로 부처님의 교단은 널리 번성하게 되었으며, 사르나트등 전법을 위해 흩어졌던 많은 제자들도 차츰 돌아오게 된다. 


 

                      < 죽림정사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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