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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샬리 (비야리성)

정혜거사 2019. 2. 12. 22:27

바이샬리 (비야리성)


①  바이샬리(비야리성)

옛날에는 파탈리푸트라까지가 마가다국 영토이고, 강을 건너 북쪽은 경전에 자주 나오는 밧지족의 영토였다. 


파트나에서 세계에서 가장 긴 10km가 넘는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를 건너가면 인도 최대의 바나나 집산지인 하지푸르를 지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바이샬리가 나온다.


파트나를 흐르는 강가강은 북쪽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칸타키강, 골고라강, 야무나강이 합쳐진 강가강과 데칸고원에서 흘러오는 손강 등 네 개의 강이 모여 하나가 되어 흐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개의 강에 비유하여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세상에는 브라흐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계급 차별이 있지만 내 법 안에는 없다. 네 개의 강이 결국하나가 되어 흐르듯 내 법 안에서도 하나가 된다."


바이샬리는 동인도 일대의 교통,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그 당시 가장 화려하고 부유했던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언론과 새로운 사상을 마음껏 누리던 인도 최초의 공화국이었다.

 

그래서 열반경에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으로 밧지족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법 7가지를 설하시는 모습이 있다.역사적으로 공화국 제도의 기원이 이 곳이라 해서 지금도 인도 중앙정부에서 국회가 개원할 때면 관리들이 이 곳 카리우나포카(Kharauna Pokhar)연못에서 물을 떠 가지고 가서 성수로 사용하며 의식을 집행하고 있다. 


                  


이 곳은 원래 인물이 출중한 왕족 출신들인 리챠비족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반 이상 천민들이 살고 있다. 아마 왕족계급이 전쟁에 져서 천민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나라가 망하니 천민들만 남아서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부처님께서 천상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려면 리챠비족을보라고 할 정도로 옷도 원색으로 아주 화려하고 매우 부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이샬 리가 마가다국에 의해 망한 후다시 어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거나 한 번도 재건된 적이 없어서, 지금은 교통도 외지고 아주 낙후한 농촌으로 변해 버렸다.



농토는 아주 비옥 하지만 여름에는 거의 절반이 강물에 잠겨있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며, 물이 빠지면 진흙으로 변해버려 신발을 신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이다. 가옥도 흙벽돌도 아닌 억새 같은 짚으로 엮어 담을 치고 사는 아주 가난한 마을이다.



부처님이 카필라바스투에서 출가하여 수행자가 사는 문명의 도시인 바이샬리에 처음 오셔서 고행주의자인 발가바 선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고행주의는 도의 길이 아님을 알고 다른 스승을 찾아 강가강을 건너 마가다국의 왕사성에 이르게 된다. 


그 곳에서 아라라까라마와 웃타카라마푸트라를 만나게 되지만 그들의 최고 경지인 무소유처나 비상비비상처역시 진정한 해탈의 길이 아님을 알고 가야로 떠난다.



성도 후 부처님께서 다시 이곳을 방문한 것은 깨달음을 얻으시고 2년째 되는 해로, 바이샬리는 극심한 가뭄으로 사람들이 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때였다. 전설에 성자(聖子)를 마을에 초청하면 자연재해를 퇴치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마침 왕사성에 성자가 출현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 곳사람들이 부처님을 청했다.



그런데 정말 부처님께서 강가강을 건너 이쪽 언덕에 발을 딛자마자 비가 쏟아져 바이샬리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고,  그래서 온 국민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되었다 .

많은 나라들 중에서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신심이 가장 돈독했고 부처님을 한 번도 음해한  적이 없었던 도시, 그리고 부처님이 가장 사랑했던 도시가바로 바이샬리이다.

 

② 바이샬리에 얽힌 부처님이야기

 
 ♣  여성 최초의 출가지

부처님이 성도 후 6년만에 스라바스티에서 고향인 카필라성을 방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출가를 했다.


그 이후 아버지인 정반왕이 돌아가시자 어머니인 마하파제파티가 부처님께 출가를 청하였고, 이미 남편이출가를 해 혼자 남은 여자 혹은 과부들과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아쇼다라를 포함하여 500명의 여인들도 부처님께 출가하기를 청하였다. 


한 번도 출가를 거절하신 적이 없었던 부처님이셨지만 그러나 거절하셨다.

여인들이 재차 출가를 청하였으나 다시 거절하시고는 바이샬리로 떠나 버리셨다.  그러자 500명의 여인들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맨발로 카필라성에 바이샬리까지 걸어왔다.


이 곳에 도착했을 때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아난존자가 가슴이 아파 부처님께 ‘여자는출가해서 성불할 수 없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여자들도 수행하면 똑같이 성불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용기를 얻어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500명의 여인들이 이곳까지 와서 부처님께 출가를 청하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마침내 부처님께서 여인의 출가를 허락하셨다.


부처님 당시 인도 풍습으로 본다면 여자는 남자에 예속되어 어려서는 아버지의 딸로, 젊어서는 남편의 아내로, 늙어서는 아들의 어머니로 소위 삼종지도로 존재할 뿐이지 인간으로서의 권한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수행자로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비구니교단을 허락하셨다.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은 부모, 자식, 남편과의 관계 즉 남자에 의지하는 않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존엄한 가치를 인정받는 기회균등의 장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두 번 거절한 것은 그러한 사회적 조건에서 출가를 허락한다면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파장을 예견 하셨을것이고, 


그러나 이 곳 바이샬리에서 허락하신 것은 이 도시의 진보된 사상과 개방된 사회분위기 때문에 사회적 물의가 적고 또 그것을 수용해 낼 만한 역량이 있다고 보셨을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머리를 깎고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아들에게 예속되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자립할 의지를 보였다는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 이후에도 많은 여성들이 출가하였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된 분들도 많았다.

 

그러나, 불멸 후 몇 백 년이 지나면서 인도의 전통사상에 의해 여자는 전륜성왕과 제석천왕과  범천왕과 마왕과 부처가 될 수없다는 5불가론(五不可論)이  제기되면서 여성교단이 폐지되고 만다.

 

 소승불교인 미얀마나 스리랑카에서는 여전히 비구니교단은  인정되지 않고 있어, 비록 승려와 똑같이 생활하지만 가사대신 하얀 옷을 입고 수행하고 있다.

 
♣  제2 경전결집과 교단의 분열

바이샬리는 또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 제 2결집이 일어난 곳이다. 제 1결집을 하고100년 정도 지나면서 계율의 현실성 문제 때문에 진보적인 승려들은 10가지 계율에 대해 새로운 제의를 했다. 


계율에는 무엇이든 일체 소유를 못하게 되어 있으나 소금의 경우는 얻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상하지않아, 먹고 남은 소금을 보관해 두었다가 먹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특히 이곳은 상업 도시라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길을 가다가 스님을 뵈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돈으로 공양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사용자에 따라서 공양을 받는것과 똑같은 개념이 될 수도있고, 재물을 축적하는 동기가될 수도 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굉장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수행자들 사이에 10가지 계율에 대한 소소한 이견이 생겼는데 이것을 십사(十事)라고 한다.

그래서 700명의 장로가 바이샬리로 집결해서 몇 달간 토론을 한 후, 십사를 비법으로 선언하고 1차 결집의 내용을 검토하여 부처님 말씀을  첨삭하며 결집을 마쳤다.
 
그러한 장로들의 결정에 반발하여  만 명의 승려들이 모여 일만송(一萬頌)이라고 하여 자기들끼리 별도로 결집을 하였다.


이때부터 이들을 대중부라고 부르고 제 2결집에 참여했던 장로들과 승려들은 상좌부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교단이  둘로 분열되는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교단 자체가  완전히 두 개로 독립한 것은아니며 계율에 대하여 견해가  다른 두 개의 파가 교단 내부에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유마거사의 고향

교단이 분열되면서 대승불교가처음 흥기한 곳이며 유마거사(維摩居士)의 고향이기도 하다.



♣  원후봉밀(猿猴奉蜜)


부처님은 모든 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결과 동물들까지도 따랐다고 한다. 

'원후봉밀'의 이야기는 이 전설을 나타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비구들과 함께 유행하던 중, 자신의 발우를 비구들의 것과 섞어서 늘어 놓았는데,   원숭이가 부처님의 발우를 골라내서는 사라나무의 꿀을 가득히 채워 부처님께 바쳤다고 한다.

또한 큰 숲의 중간  강당 한 모퉁이에 있는 연못을 가리켜  원후지(猿猴池, 람-쿤드,Ram-Kund)라 이름짓고 있는데, 이곳은 수천 마리의 원숭이들이 흙을 파서 부처님이 목욕할 수 있게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다 복원되어 있다 .

현장법사는 그 연못 곁에 아쇼카왕의 석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바이샬리에 있는 석주 근방에서는 연못은 볼수 있으나 중간 강당의 자취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  케사리아 유적군

 
케사리아 유적군은 부처가 출가하여 시종과 말을 돌려보내고 

사냥꾼과 옷을 바꾸어 입었다는 곳이다.  계속 발굴중이다. 


(바이샬리에서 쿠쉬나가르 가는길 중간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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