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의 섬’으로 불리는 인도 남단 불교국가 | ||
스리랑카의 행정수도인 콜롬보에 위치한 강가라마 마하 사원의 불상 모습으로 온화한 스리랑카인을 닮았다. |
인도대륙의 남단 인도양 위에 떠 있는 섬나라인 스리랑카는 예로부터 ‘동양의 진주’, ‘보석의 섬’으로 불렸다. ‘실론’으로 더 널리 알려진 스리랑카는 기원전 3세기부터 초기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오늘날까지 불교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오고 있다.
스리랑카는 인구 1500만 명 가운데 67.4%가 불교도이다. 이에 비해 힌두교는 17.6%, 기독교 7.8%, 회교도 7.1%, 기타 0.1%이다. 이 가운데 불교도는 대부분이 싱할라인이며, 힌두교는 남인도의 타밀계 인종에 한정되어 있다.
헌법에서는 ‘세속국가’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불교에 최우선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섬 전체는 불교적 세계관이 지배한다. 조계종도 이곳에 ‘조계종마을’을 건설해 한국불교의 자비정신을 심고 있기도 한 스리랑카의 주요 불교성지를 살펴본다.
# 수도 콜롬보 사원들
스리랑카 행정수도인 콜롬보 켈라니아 강변에 위치한 켈라니아 라자 마하 사원은 스리랑카 불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지 중 하나로 꼽히는 장소로 현지어로는 ‘라자 마하 비하라’로 불린다. 라자 마하 비하라는 ‘위대한 왕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이곳 사람들은 2500년 전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 홀연히 스리랑카에 오시어 불법을 설치하고 다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켈라니아 사원이다.
건립시기는 기원전 후의 시기라고 하는데 후에 힌두교 침입자들에 의해 본래의 사원은 파괴됐고 다시 복원되었으나 16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또 다시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19세기에 복원된 사원의 모습이다. 하얀 색 탑은 부처님께서 앉아서 설하진 장소라고 믿는 곳으로 현재 탑 속은 다른 탑과 달리 텅 비어 있다고 한다.
법당 안에는 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자타카 이야기와 보살상들이 그려져 있고 본당 내에는 편안히 휴식을 취하고 계신 와불이 모셔져 있다. 그 외 힌두교의 신상들도 같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민중속에서 함께하는 힌두와 불교의 공존을 의미한다. 매 년 정월 대보름에는 이곳에서 ‘두루투 페라헤라’라고 하는 큰 축제가 열린다.
콜롬보 시내에 위치한 강가라마 마하 사원은 1885년 스리랑카 불교 재건 운동을 주도한 히카두웨 스리 나야카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강가라마는 ‘물을 다스리는 왕’이란 뜻이다. 사찰을 창건한 히카두웨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불교의 맥이 끊어져 타이, 버마 스님들로부터 수계를 받는 굴욕적인 사건을 경험하고, 스리랑카 불교 재건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스님이 처음부터 주목했던 부분은 교육으로 1873년 ‘비도다야 피리베나’ 학교를 남부 해안지대에 설립했다. 스님은 단지 7명 밖에 안 되는 학생이지만 그들에게 불교 철학, 산스크리트어, 빨리어 및 스리랑카 전통문화를 가르치며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콜롬보에 ‘비다랑카 피리베나’ 학교를 1875년에 설립한다.
학비는 전액 히카두웨 스님이 부담했고, 스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나날이 학생이 늘어 다시 스리랑카 불교의 전성기를 이끄는 큰 공헌을 했다. 스님이 처음 만들었던 비도다야 피리베나 학교는 후에 코테 대학으로 발전했고, 두 번째 만든 비다랑카 피리베나 학교는 켈라니아 대학으로 발전했다.
만년에 그가 머물고 경전을 간경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강가라마 사원은 비록 역사는 100여 년 밖에 안되었지만 꺼져가는 스리랑카 불교의 불씨를 다시 되살렸던 모태가 되는 성스러운 장소다.
현재 이곳엔 대법당과 역대 조사 스님들의 흉상, 유물이 보존된 박물관, 그리고 부도탑과 세계 각국의 귀중한 불교 문화재가 소장된 보물관이 있으며 이 보물관에는 성스러운 부처님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매년 2월 보름날 ‘나밤 페라헤라’라는 큰 축제가 열리는데 이 축제기간 중에는 코끼리 등에 부처님 사리를 얹고 시가 행렬을 벌인다.
# 밀림지대 바위 유적 ‘시기리아’
중부 밀림지역 화강암에 조성돼 있는 불교유적 ‘시기리아’ 전경. |
시기리아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유적지로 스리랑카 중부의 밀림 지대에 우뚝 솟은 높이 200m의 화강암 바위를 말한다. 시기리아는 ‘사자산’이라는 뜻이다. 산 정상에 고대 왕궁 유적이 남아 있어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손꼽힌다. 시기리아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성지 중 하나로 모항공사 TV 광고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친숙해진 곳이다.
시기리아는 불가사의 그 자체이다. 밀림 속에 홀연히 솟아 있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 정상에 어떻게 왕궁을 건설했는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정상까지 오르려면 경사가 급한 철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펼쳐지는 밀림과 산, 유적이 동시에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사자 모양의 성문 유적에 남아 있는 거대한 발의 앞부분과 암벽에 그려진 500명의 천상계 여인의 모습이 옛 영화(榮華)를 그대로 웅변해주고 있다. 바위산 아래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과 담장과 벽으로 둘러싸인 유적이 펼쳐져 관광객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 제2도시 캔디의 불치사
스리랑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부처님 치아사리가 모셔서 있는 캔디시 불치사 내부 모습. |
불치사는 콜롬보의 북동쪽 1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스리랑카의 제2도시인 캔디에 위치한 불교사원이다. 불치사는 연주황 벽에 갈색 지붕을 한 싱할라 건축양식의 팔각형 전각이 아름답게 균형을 이루고 서 있다.
사원 내부에는 크리스탈 바위를 깎아 만든 석가의 좌상, 정밀한 조각이 새겨진 돌문, 옅은 감색의 화려한 당초 모양으로 만들어진 천장 등이 차분한 사원 내부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사원 안에 봉안되어 있는 부처님 치아사리는 인도에서 부처님이 열반했을 때 모셔온 것이라고 한다. 스리랑카로 모셔온 때는 4세기로 인도의 오릿사주 카링가 왕자가 머리카락 속에 감춰 들여왔다고 한다. 그 뒤로 수도를 옮길 때마다 불치사리도 함께 이동했으며 마지막에는 캔디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불치사리가 캔디로 옮겨진 것은 1590년, 캔디 왕 수리야 1세때였는데, 그는 불치사리를 모시기 위해 2층 건물의 사원을 지었다. 그리고 3대 아래인 왕이 사원을 신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사원 내부에 남아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현재 불치사를 둘러싼 법당과 전각은 캔디왕조의 마지막 왕 라자신하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이곳의 팔각형 탑은 19세기 전반 영국 점령시대에 유치장으로 바뀌었으나 지금은 야자 잎 사본이 소장된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치사리를 매우 소중한 것으로 여겨 왔다. 왕권의 상징으로서 불치사리가 있는 곳이 바로 스리랑카의 수도였다.
16세기 후반, 그리스도교도인 포르투갈인이 캔디를 점령했을 때에는 불교도의 혼이라고 할 수 있는 불치사리를 빼앗아 인도의 고아 지방에서 부수겠다고 선언했으나 싱할라인들은 가짜 불치로 포르투갈인을 속여 진짜 불치사리는 캔디에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는 사연도 있다.
사원은 새벽부터 황혼 무렵까지 개방되어 있어 참배가 자유롭지만 불치사리가 있는 방의 문이 열리는 때는 하루에 세 번 행해지는 의식 때다.
김용섭 바랑메고 부장은 “불교국가인 스리랑카는 이외에도 담불라 황금사원 등 온 나라가 불교유적으로 가득하다”며 “한국불교도 ‘조계종마을’을 건립해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전하고 있는 가볼만한 불교성지”라고 말했다.
자료협조=대승항공여행사
[불교신문3065호/2014년12월10일자]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저작권자 © 불교신문>
승인 2014.12.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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