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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방감초' 스타틴의 재발견

정혜거사 2020. 6. 2. 20:23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요즘 균류(곰팡이)의 세계를 다룬 책 《Entangled Life(얽힌 삶)》을 읽고 있는데 꽤 재미있다. 책의 서론에서는 균류에서 얻은 유명한 약물들 가운데 콜레스테롤 저하제인 스타틴이 등장한다.

 

균류에서 유래한 약물로는 알렉산더 플레밍이 1928년 푸른곰팡이의 한 종(Penicillium chrysogenum·학명 페니실리움 크리소게눔)에서 추출한 항생제 페니실린 정도만 알고 있던 필자에게는 뜻밖이었다. 게다가 최근 스타틴에 부쩍 관심이 생긴 터라 이참에 스타틴에 대해 좀 더 알아봤다.

콜레스테롤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생체분자지만 지나치면 심혈관질환의 위험성을 높인다. 따라서 콜레스테롤이 많은 음식을 피해야 하지만 몸에서 스스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일찌감치 이를 억제하는 약물을 찾았다.

 

특히 1960년대 콜레스테롤 생합성 메커니즘이 밝혀지면서 HMG-CoA 환원효소가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효소의 작용을 억제하는 약물을 찾으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출 수 있을 것이다.

푸른곰팡이 한 종에서 억제제 발견

1973년 일본 제약회사 산쿄의 생화학자 엔도 아키라 박사는 푸른곰팡이의 한 종에서 HMG-CoA 환원효소 억제 성분인 메바스타틴을 발견했지만 동물실험에서 장기 투여 독성이 나타나 제품화에는 실패했다. 만일 메바스타틴이 첫 스타틴 약물이 됐다면 엔도 박사는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지 않았을까.

 

교보문고 제공 1971년 일본 제약회사 산쿄의 연구원이었던 생화학자 엔도 아키라도 HMG-CoA 환원효소 억제제를 찾는 과학자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평소 플레밍을 흠모했던 엔도 박사는 균류에서 새로운 항생물질을 찾는 프로젝트를 하며 덤으로 억제제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균류가 경쟁자인 박테리아를 물리치기 위해 세포벽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페니실린을 만들었듯이 박테리아가 생존에 필요한 스테롤(참고로 동물이 만드는 콜레스테롤은 스테롤의 하나다)을 못 만들게 박테리아의 HMG-CoA 환원효소를 억제하는 물질을 만들 수도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엔도와 동료들은 2년이 넘게 균류 6000여 균주에서 이런 물질을 찾았고 마침내 푸른곰팡이의 한 종(Penicillium citrinum·페니실리움 시트리눔)에서 HMG-CoA 환원효소의 활성을 강력하게 억제하는 약물을 발견해 훗날 메바스타틴(mevastatin)이라고 명명했다.

 

메바스타틴은 박테리아뿐 아니라 동물의 HMG-CoA 환원효소도 억제했지만 개를 대상으로 한 장기 독성 실험에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 임상시험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 뒤 연구자들은 메바스타틴을 효소로 변형시킨 분자 프라바스타틴을 만들어 1991년 제품화에 성공했지만 ‘최초의 스타틴 약물’이라는 영예는 이미 다른 팀이 차지한 뒤였다.

1978년 미국 제약회사 머크의 연구자들은 역시 균류인 누룩곰팡이의 한 종인 아스페르길루스 테레우스(Aspergillus terreus)에서 HMG-CoA 환원효소의 활성을 강력하게 억제하는 물질을 찾았다. 훗날 로바스타틴(lovastatin)으로 명명된 이 분자의 구조는 메바스타틴과 거의 똑같았다. 세 번째 탄소에 수소(-H) 대신 메틸기(-CH3)가 붙어있는 것만 다르다.

동물실험 결과 효과가 뛰어났고 부작용이 거의 없어 1980년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1상 임상시험을 진행해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산쿄의 메바스타틴 동물실험 장기 독성 결과가 알려지면서 겁을 먹은 경영자들은 2상 임상시험 계획을 중단시키고 동물실험을 더 해보기로 했다.

로바스타틴의 효과를 들은 의사들은 심각한 고지혈증으로 상태가 위급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이를 적용하는 허가를 얻어 머크에 약물을 요청했다. 이렇게 진행된 몇몇 소규모 임상이 성공하자 자신감을 찾은 머크는 1983년 본격적인 임상시험에 들어갔고 1987년 미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얻어 최초의 스타틴 약물이 탄생했다.

그 뒤 분자 구조를 조금 달리해 약효와 부작용을 개선한 스타틴 계열 약물들이 여러 개 나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머크의 심바스타틴(로바스타틴을 살짝 바꾼 분자)과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의 아토르바스타틴이 가장 널리 처방되고 있다(특허가 풀려 여러 복제약이 나와 있다).

 

화이자는 1996년부터 2011년까지 아토르바스타틴 독점판매 기간 동안 무려 1250억 달러(약 150조 원)어치를 팔아 단일 의약품 매출액 기록을 세웠다.

그럼에도 스타틴은 의료계와 제약업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표적이 돼 왔다. 제약업계와 결탁한 의사들이 고지혈증인 사람들에게 겁을 줘 안 먹어도 되는 스타틴을 평생 복용하게 한 결과 심각한 부작용만 얻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물든 필자도 최근까지 스타틴은 나쁜 약물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How to starve cancer(암을 굶기는 치료법》이라는 책을 읽으며 스타틴을 다시 보게 됐다.

메바스타틴(오른쪽)은 콜레스테롤 생합성의 초기 단계인 HMG-CoA(왼쪽)를 메발로네이트(mevalonate)로 바꾸는 효소의 작용을 억제한다. 메바스타틴의 분자 구조를 보면 오른쪽 위 부분이 HMG-CoA와 매우 비슷해 효소가 더 잘 달라붙는다. 1987년 출시된 최초의 스타틴 의약품 로바스타틴은 메바스타틴 3번 탄소에 붙어있는 수소가 메틸기(-CH3)인 것만이 다르다(빨간색). ‘지질연구저널’ 제공암 억제 효과 속속 밝혀져

최근 항암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품귀 현상을 빚었던 동물용 구충제 '펜벤다졸'. 머크 제공 필자는 우연히 《암을 굶기는 치료법》이라는 책을 알게 됐다.

진행성 암 진단을 받고 절망적인 상태에 놓인 저자 제인 맥렐런드는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치료법을 시행하는 의사들을 찾고 최신 연구결과를 스스로 공부해 자신에게 적용한 결과 암에서 회복했고 2018년 그 과정을 담은 책을 펴냈다.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대사의 관점에서 암을 바라보고 있다.

 

암세포의 생존과 증식에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면 암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사이비 과학 같지만 놀랍게도 암의 대사는 최근 핫이슈로 지난 3월 26일자 학술지 ‘네이처’에도 ‘암 치료에 도움을 주는 식이 조절’이라는 제목의 리뷰논문이 실렸다.

책과 논문에서 암을 굶기는 대표적인 식이 조절로 포도당을 제한하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소개하고 있다. 암세포는 증식을 위해 포도당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저탄고지의 극단적인 형태가 ‘케톤식(ketogenic diet)’으로 암 억제 효과가 뛰어나다는 연구결과가 여럿 나왔다.

그럼에도 맥렐런드는 장기간 케톤식을 유지하기는 어렵다며 저탄고지를 지향하는 식단을 짜며 아울러 암세포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여러 약물을 동시에 복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칵테일 요법). 이 가운데는 의학계와 말기암 환자들 사이에 효능과 안정성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 구충제인 메벤다졸(펜벤다졸과 같은 계열이다)도 보이지만 저자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약물은 메트포르민과 스타틴이다.

당뇨병 치료제인 메트포르민이 암 억제에 효과가 있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지만 스타틴은 뜻밖이었다. 메트포르민은 암세포가 갈망하는 혈당을 낮추는 약물이므로 대사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가 가지만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스타틴은 어떻게 효과를 낼까. 저자는 콜레스테롤이 세포막을 이루는 주요 성분이므로 스타틴 복용으로 콜레스테롤 생합성에 방해를 받으면 세포 증식이 억제된다고 설명한다.

2000년대 들어 스타틴의 암 억제 효과에 대한 논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 2014년 학술지 ‘약리학 저널’에 발표된 리뷰논문에 실린 그림으로 스타틴이 암세포 증식과 전이를 억제하거나(왼쪽) 암세포가 항암제에 취약하게 만들거나 세포사멸에 이르게 유도하거나 면역계를 조절하는 작용을 한다(오른쪽).

 

‘약리학 저널’ 제공 과연 그럴까 싶어 ‘스타틴과 암’으로 검색해보니 스타틴의 암 억제 효과에 대한 연구결과가 꽤 된다. 연초 미국 심장협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미국 듀크대 연구팀의 발표에 따르면 2001~2011년 사이에 대장암 진단을 받은 2만9498명을 5년 동안 추적 조사한 결과 진단 당시 스타틴을 복용하고 있었던 그룹이 복용하지 않은 대조군에 비해 대장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38%나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2월 25일자 미국립과학원회보에 실린 논문에서 미국 존스홉킨스의대 연구자들은 스타틴이 암세포의 생존에 필요한 GGPP라는 생체물질의 합성을 방해해 암세포를 사멸로 이르게 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밖에도 최근 수년 사이 간암, 담도암, 전립선암 등 여러 암에 대해 억제 효과가 있다는 국내외 연구진의 논문이 여러 편 나왔다.

다만 이런 약물들은 암의 예방 또는 재발 방지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치료에서는 기존 항암제와 함께 쓸 때 항암제 단독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

장내미생물 조성에 영향 미쳐

지난 2017년 연구결과에 따르면 네 가지 장유형 가운데 박테로이데스2형(Bact2 enterotype)인 사람들은 장 건강이 나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염증성 장질환 환자의 75% 이상이 박테로이데스2형이다. 최근 분석 결과 비만인 사람에서 박테로이데스2형의 비율이 스타틴을 복용하지 않는 그룹은 17.7%인 반면 복용하는 그룹은 5.9%에 불과했다.

 

스타틴이 염증성 장질환 증상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네이처 제공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지난 5월 21일 스타틴의 또 다른 측면을 밝힌 연구결과가 실렸다. 스타틴과 장내미생물 조성이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장에는 수백 종의 미생물이 살고 있는데 그 조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지난 2011년 독일을 비롯한 다국적 연구팀은 33명의 대변에서 메타게놈을 분석한 결과 마치 혈액형처럼 장내미생물도 세 가지 장유형(enterotype)으로 나뉨을 발견했다. 박테로이데스속 미생물이 가장 많이 사는 장유형1과 프레보텔라속 미생물이 가장 많이 사는 장유형2, 루미노코쿠스속이 미생물이 가장 많은 장유형3이다.

지난 2017년 벨기에 루뱅대 연구자들은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장유형을 네 가지로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며 새로 이름을 붙였다. 기존 장유형1을 박테로이데스1형과 박테로이데스2형로 나누고 장유형2는 프레보텔라형, 장유형3은 루미노코카시형으로 명명했다.

이들이 박테로이데스 우점종인 그룹을 굳이 둘로 나눈 건 박테로이데스 비율이 좀 더 높고 종 다양성이 낮은 박테로이데스2형이 장의 염증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염증성 장질환이 있는 사람의 75% 이상이 박테로이데스2형인데 비해 질환이 없는 사람은 이 유형이 15% 미만이다. 또 비만이 심해질수록 박테로이데스2형의 비율이 높다.

연구자들은 관련 데이터를 모아 분석하는 과정에서 특정 약물 복용이 이런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봤고 뜻밖에도 스타틴이 걸렸다. 체질량지수(BMI)가 30 이상으로 비만인 사람 가운데 스타틴을 복용하지 않는 그룹의 박테로이데스2형의 비율이 17.7%인데 비해 복용하는 그룹은 5.9%에 불과했다.

 

반면 BMI가 30 미만인 사람들에서는 복용 여부가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다른 데이터도 분석했는데, 스타틴 미복용 그룹은 박테로이데스2형이 16.3%인 반면 스타틴 복용 그룹은 4.7%로 역시 큰 차이가 났다.

박테로이데스2형인 사람은 장 건강이 나빠질 위험성이 큼에도 이를 다른 유형으로 바꿀 마땅한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이번 발견은 주목을 받았다. 다만 아직은 스타틴이 장유형에 영향을 주는 인과관계인지 그저 상관관계인 것인지 알 수 없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필자 생각에는 인과관계일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 애초에 균류가 박테리아를 통제할 수단의 하나로 HMG-CoA와 비슷한 구조를 포함한 스타틴 분자를 만들어 박테리아의 HMG-CoA 환원효소를 속여 스테롤을 못 만들게 하는 전략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박테로이데스2형에서 우점종인 박테리아들이 스타틴에 좀 더 취약해 세가 위축되면서 다른 장유형으로 바뀐 게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스타틴은 난치병인 염증성 장질환을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타틴 계열 약물의 시장이 워낙 크고 부작용 사례도 적지 않다 보니 어느새 스타틴은 약물에 의존하는 현대 의학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거대 제약회사가 아무리 막강한 로비를 펼치더라도 보건당국이나 의사, 환자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효과는 미미하고 부작용이 큰 약물이 30년 넘게 확고하게 자리를 지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메트포르민(유력한 노화 억제제 후보이기도 하다)과 함께 스타틴이 ‘약방의 감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필자소개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8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기사입력 2020.06.02. 오후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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