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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

정혜거사 2018. 8. 29. 10:59


티베트(Tibet) 불교 역사

                                      

                        

                                      밀라레파(Milarepa)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喇?敎, Lamaism)라고도 한다. 원래 스승이라는 용어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로 ‘구루(Guru)’라고 하는데, 이것을 티베트어로 번역한 말이 ‘라마(Lama)’이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喇摩敎)’라고도 한다. 해석하면, ‘스승(Lama)의 종교’란 말이다. 티베트 불교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계율과 금강승의 신앙적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 몽고,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 주위의 국가들에서 믿어지고 있다.



   티베트 최초의 불교전래는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승리를 거둔 이후의 일로서, “개혁파”인 겔룩파는 나가르주나의 가르침에 따라 공(空)을 실현하기 위해, 즉 구원을 얻기 위해 논리학과 변증법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티베트의 모든 학파들은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받아들였다. 특히 여성적, 수동적 원리인 고차원의 지혜가 남성적, 능동적 원리인 실천으로서의 “방편적 수단”과 밀접하게 결부돼 있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지혜"는 "실천"에 의해서만 나타난다고 했다.



   티베트 불교의 특징 중의 하나는 ‘구루(Guru)’의 중요성으로, 티베트 불교의 구루(스승)는 거의 신적인 지위에 있다. 구루는 제자에게 입문식을 베풀어주고 경전의 비의적 의미를 가르쳐주며 만능적이고 비밀스런 만트라(眞言)를 전수해준다.


제자의 구루에 대한 신앙은 절대적인 것으로, “스승의 머리털 하나하나까지 존숭하는 것은 삼세(과거, 현재, 미래)의 일체불을 존숭하는 것보다 더 큰 공덕”이라 여긴다.



   그리고 수행승의 종교활동은 전적으로 요가-탄트리즘적인 일련의 영적수행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명상으로 이에 도움이 되는 신들의 도상, 만다라 등 몇몇 외적 사물들을 사용할 수 있다.



   곰(gom)은 티베트어로서 명상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명상이란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바바나(bhavana)이며, 티베트어로는 곰(gom)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특정한 습관이나 존재방식을 키우는 것과 같은 ‘개발’의 의미를 지닌다.


곰(gom)은 좀 더 정확한 말로 ‘친밀해지기’라는 뜻이다. 명상이 단순히 나무그늘 아래 한적히 앉아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자신의 내면 관조, 현상계와 사물들을 지각하는 새로운 방식과의 친화란 말이다.



   그리고 티베트 불교 특징은 종파적 발전이다. 광대한 평야와 험준한 산맥이 많은 지리적 특성상 중앙정부가 티베트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불교 역시 중앙정부와 지방귀족들, 그리고 사원들 사이의 역동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 속에 형성된 티베트 불교종파는 티베트에 불교가 정착하고 발전하는 과정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티베트 불교종파를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구파(rnying ma, 舊派)와 신파(gsar ma, 新派)이다.



 닝마파(rny-ing ma pa) ― 구파인 낭마파는 티베트 불교종파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종파(구파)이다. 닝마파는 파드마삼바바(蓮華上座師, Padmasambhava)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닝마파는 티베트 명상수행법인 족첸(Dzogchen; 大圓滿; 위대한 완성)을 최고 수승한 가르침으로 간주했고, 론첸파(1308∼1364)는 그 족첸의 가르침을 체계화했다. 초기 닝마파는 재가 신도와 승려들로 구성됐다.


그들은 훗날 랑다르마 왕(836∼842)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통을 계승했다. 11세기부터 불교가 다시 부활하면서, 그 새로이 등장한 불교와 구별하기 위해 닝마파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닝마파(오래된 종파)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비해 후에 일어난 모든 티베트 불교종파들은 신파(新派)에 속한다.



   여기서 잠간, 티베트어 ‘~파(pa)’라는 용어는 사람 또는 구성원이란 의미이다. ‘~어떤 사람’ ‘~어떤 집단’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파(派)’와 발음이 비슷해서 오해할 수 있다. 실제로 ’파(派)‘란 뜻으로 쓰일 때가 많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pa‘를 ’빠‘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닝마빠라 표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티베트는 특이하게도 인도 본토와 지근거리에 있으면서도 국가 공식적인 불교는 중국에 비해서 아주 늦게 들어왔다. 그러다가 보니 대승불교 후기에 속하는, 힌두교와 동화된 이후의 밀교가 들어왔다. 거기에 티베트의 샤머니즘이 가미 돼 신비주의가 혼합된 양상을 보여주면서 탄트라 불교가 됐다.


 

   그리고 9세기에는 대부분의 불교경전이 출판됐고, 13세기에 처음으로 <티베트 대장경> (나르탄古版)을 개판(開版)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대장경 출판이 거듭됐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망했기 때문에 인도 후기 불교의 경론(經論)은 티베트 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으며,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티베트 역은 충실한 직역이기 때문에 티베트 역으로부터 산스크리트어 원전(原典)을 복원시킬 수 있는 자료 구실도 하고 있다.



   그리고 티베트 불교에서는 몸으로 신심으로 표현하는 절이 강조 되는데, 이는 밀교에서 신(身) ? 구(口) ? 의(意)의 일치와 표현(무드라)을 중시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몸으로 표현하는 절을 중시하는 듯하다.


절은 서서 시작하지만 온몸을 다 땅에 닿게 절을 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가 발달하고 있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에서는 기본수행 중에 천배, 만배, 10만배 등과 10만염불 등이 들어 가 있다.



   인도 불교는 티베트에 크게 두 번에 나누어 전래됐다. 전기는 대개 600년~850년 사이에 이루어졌고, 후기 전래는 950년~125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1) 전기 불교 전래(600~850)

 

   초기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 왕조의 후원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티베트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인도 불교가 티베트에 자리를 잡는 데에는 세 가지 큰 장애가 있었다.

 

   1) 첫 번째 문제는 티베트 토속종교인 본(bon-뵌)교와의 대립이었다.


    ? 송챈감포왕(Songtsen Gampo, 松贊岡保, 617~650) ― 티베트에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왕이다. 송챈감포왕은 그의 신하 톤미 삼보타(吐彌桑布札)를 인도에 파견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참고해서 티베트 문자를 창조했다.


그때까지 문자나 문법서가 없었던 티베트에서는 티베트 문자와 문법서를 창작하고, 이에 의해 7세기경부터 불경번역이 시작됐다. 그는 또한 많은 새로운 문명과 기술의 발전을 이룩했다.


한편 송챈감포는 중국 당 황실의 문성공주(文成公主)를 왕비로 맞이하고, 네팔 왕실에서는 브리쿠티 데비(Bhrikuti Devi) 공주를 왕비로 맞이했다. 그리고 이 두 왕비가 각기 중국계와 인도계 불교를 도입했다.



          본교(Bonpo, 뵌포) ― 티베트에는 주술을 중시하는 티베트 고유 신앙인 본교(뵌교)가 BC 3000년경에 성립돼 존속하고 있었다. 토착 샤머니즘 종교로서 본교는 불교가 티베트에 뿌리를 내리기 전에 왕실은 물론이고 민중들의 모든 의식을 주도해 왔다.


따라서 불교가 티베트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한때 경쟁 관계에 있기도 했으나 불교가 본교(bon敎)를 배척하지 않고 불교에 혼합해 티베트 불교(Tibetan Buddhism)로 포섭해갔다. 이렇게 해서 송챈감포왕은 라마교(喇?敎/Lamaism)라고 하는 티베트 불교를 궤도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뵌교가 티베트에서는 불교에 흡수돼 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히말라야 산맥 심장부에 위치한 은둔의 왕국 무스탕(Mustang)엔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한다. 시간이 멈춘 땅으로 알려진 무스탕이 지금은 네팔의 영토 내에 포함돼 있지만 주민이나 문화는 온전히 티베트에 속해, 티베트 고대문화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 티송 데첸왕(Trisong Detsen 742~797, 赤松德贊) ― 티베트 전기 불교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은 8세기 중엽 송챈감포왕의 손자 티송 데첸왕(赤松德贊)에 의해서였다. 티송 데첸왕은 불교를 티베트 국교로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 네팔에 머물고 있던 인도 중관학파 승려 적호(寂護, 샨티락시타, Shantiraksita)와 그의 제자 파드마삼바바(蓮華上座師, Padmasambhava, 본명 Kamalasila)를 초정해 밀교(密敎)를 도입하면서부터 티베트 불교는 밀교(탄트라불교) 일색이 됐다.


적호(寂護)는 왕실의 후원 하에 삼예사(桑耶寺, bsam yas dgon pa)를 건립하고 티베트의 첫 승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파드마삼바바(蓮華戒)는 사악한 악령들과 비불교도들의 힘을 가라앉히고 개종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족적이 닝마파에 많이 남아 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제 2의 붓다로 존경했다. 그래서 현재에도 히말라야 지역의 국가들에서 그는 구루 린포체로 불리어지며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 남아 티베트의 강산 곳곳에 <티베트 사자의 서>를 비롯해 여러 비장서(gter ma, 秘藏書)를 숨겨 놓고 불교를 홍포한 뒤에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파드마삼바바는 다시 네팔로 돌아갔다. 유명한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가 바로 파드마삼바바의 저작이라고 한다.

 

   2) 두 번째 문제는 중국의 매우 급진적인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선종(禪宗)과 체계적인 수행 방법에 따른 깨달음을 주장하는 인도 불교의 충돌이었다[돈점논쟁(頓漸論爭)].



   티송데첸왕은 두 불교를 조절하기 위해 인도 승 파다마삼바바(Kamalasila, 蓮花戒, 본명 Kamalasila/까말라실라, 740~795)중국 선종 하택 신회(荷澤神會)의 제자인 대승화상(大勝和尙, 마하연/摩訶衍, 티베트명 흐와샹 마흐옌/Hva shang Mah yan)을 초청해 이 둘 사이의 돈점논쟁(792년~794)을 직접 주관했다. 이 논쟁의 장소는 그가 세운 시무에(Bsam-yas)승원이었다.



   왕이 친히 논쟁을 주관하고, 논쟁의 결과에 따라서 패한 측은 승리한 측에 화환을 헌상하고 티베트를 떠난다는 조건이었기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됐다.



   여기서 초반에는 대승화상이 우세했으나 결국 패배해 사주(沙州; 지금의 돈황)로 쫓겨나고, 그리하여 이 논쟁 이후에 티베트에는 인도 불교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이 됐다. 그리하여 티베트 불교는 인도 불교를 계승 발전시켰기 때문에 한국 불교와 달리 인도의 후기 대승불교 시대를 장식했던 후기 중관파(後期中觀派)와 논리학, 그리고 탄트라불교의 교학과 수행체계를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3) 세 번째 문제이며, 랑달마왕(glang dar ma)의 폐불정책이었다.


    ? 랑달마왕(glang dar ma, 재위 838~842) ― 티송데첸왕의 아들인 랑달마왕은 본교에 의지해 모든 사원을 폐하고 승려들을 죽이거나 환속시켰다. 그러다가 랑달마왕은 842년 암살당했다. 이 암살 사건은 랑달마왕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두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을 낳았고, 결국 이로 인해 티베트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5세기 중반까지 티베트의 역사를 담고 있는 <청사(靑史, deb th-er sngon po)>에 의하면, 왕조의 몰락과 동시에 세 분의 스님들이 율장과 논장을 싣고 서티베트인 아리(阿里, nga ri), 몽골, 동티베트 등지로 흩어졌다고 한다.



   이때 서부 티베트 아리지역(지금의 자다현)으로 간 일파가 세운 나라가 신비의 왕국으로 불리는 구게왕국(Guge, 古格王國)이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지더니마(吉德尼瑪) 왕자가 아리지역으로 도피해 새로 세운 왕국이었다.



   지더니마는 후에 아리 지역을 세 부분으로 나눠 세 아들들에게 나눠줬는데, 이들 나라가 라다크왕국, 푸란왕국, 그리고 구게왕국이다. 중심지는 히말라야 산맥 북서부 지금의 티베트와 라다크 중간 지대, 지금은 중국 땅 자다현(Zadha, 札達縣, 해발 3500m) 지역으로 ?링(Tholing)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워낙 티베트 중심부와 먼 거리에 있어, 이후 구게왕국은 티베트 역사에서 제외됐다.



   구게왕국은 지더니마의 셋째 아들인 더짜오(德朝)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서장왕신기(西藏王臣記)>에 따르면 구게왕국은 700여 년간 16명의 왕이 차례로 불교왕국으로 통치했으며, 특히 1203년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할 당시, 잔존 불교세력들이 이 구게왕국으로 도망 왔다고 한다. 이렇게 700년을 이어오던 왕국은 1635년 라다크 군대의 침공을 받고 패망했다 한다.



   이상과 같이 티베트 왕조의 몰락으로 인해 티베트에 인도 불교가 전래되는, 전기 전래시기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그리하여 티베트의 불교는 이 랑달마왕의 불교 탄압을 기점으로 구역 불교(舊譯佛敎)와 신역 불교(新譯佛敎)로 구분된다. 

 

(2) 후기 불교 전래(950~1250)

 

   이리하여 티베트 왕조의 몰락으로 인해 불교는 중앙지배국가의 지지를 잃게 돼, 이후 티베트는 중앙정권이 없는 무정부상태로 400년을 지내야 했다. 불교 탄압 이후로 공식적인 불교 사원이나 승려들이 없었던 백 년 동안 일부의 개인들은 제멋대로 불경을 해석하면서 때로는 수행을 빙자해서 타락한 행동을 해서 사회기강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에 티베트 불교는 지방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지방귀족의 후원에 의한 불교발전은 한편으로 볼 때 티베트 불교의 다양한 종파적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분쟁의 씨앗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불교는 인도 불교의 후기 전래시기(950~1250) 접어들고, 이후 생긴 불교를 신파(新派, gsar ma)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중앙아시아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티베트 서부 아리(nga ri)와 동부 암도(a mdo) 및 캄(khams) 지방의 불교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그 여파가 중앙 티베트까지 이어졌다.



   또한 인도에서 불교가 쇠락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스님들과 밀교수행자들이 10세기 중반부터 티베트에 직접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티베트 불교는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의 특징은 지방 세력의 영향력 아래 종파불교의 양상을 띠면서 발전했다.


 

   또한 중앙 티베트에서도 많은 티베트인들이 인도와 네팔로 직접 가서 현교와 밀교를 배우고 다시 티베트로 돌아온다. 그리고 지방 귀족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번역(gsar ’gyur, 新譯)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닝마파가 전기 전래시기의 구역에 의지해 전통을 이어왔다면,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티베트 불교종파들은 신역에 의지했다. 이러한 면에서 구역과 신역은 닝마파와 이후 시대의 다른 종파를 구분하는 큰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역과 신역의 두드러지는 차이점 중의 하나는 후원자가 누구인가이다. 구역의 경우 티베트 국왕들이 정치ㆍ경제적으로 후원했다면, 신역은 지방 귀족 세력의 후원 하에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오는 인도승려들, 혹은 인도나 네팔에 직접 가서 배워온 티베트인들이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문헌들을 티베트어로 번역한 경우이다.


 

    ? 아띠샤(Ati?a, 980~1054) ― 티베트 불교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인도 출신 승려이다. 아띠샤(Ati?a)는 그의 저서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에 의한 현밀겸수(顯密兼修)의 교풍을 세웠으며, 계율 중심의 승가 전통을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아띠샤의 가르침을 따르는 까담파의 성립은 이후 티베트 불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까담파(bKa gDams pa)는 아띠샤(Ati?a)를 종조로 하며, 랑달마왕의 폐불 이후 부활했다. 까담파는 계율을 중시했으며, 현교와 밀교에 정통한 승려들이 있었으나 외적 세력 확장에 실패해 사라지게 됐다.


하지만 사꺄파, 조낭파에 이어 신까담파(bka’ gdams gsar ba)라 불리는 겔룩파(dge lugs pa)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까지도 까담파의 저작들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다.



   후기 불교 전파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밀교의 활발한 전개이다. 랑달마왕이 암살 당한 후, 왕실의 후원을 받던 불교가 중앙 티베트에서 사라졌을 때, 중앙 티베트 지역에서 불교 명맥을 유지한 것은 일족을 중심으로 한 재가신도들이었으며,


불교 부흥기에 들어 많은 밀교 수행자들(tantrika)이 인도로부터 들어오고, 또한 많은 티베트인들이 인도와 네팔로 직접 가서 밀교를 배워왔다. 특히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가운데 까규파(bka’ rgyud pa)와 사꺄파(sa bskya pa)의 경우가 그러하다.



    ? 마르파(Mar-pa, 1012~1097) ― 4대 종파 가운데 까규파의 경우, 11세기에 재가생활을 하면서 불경의 번역가로 이름을 떨친 위대한 스승 마르파(Mar-pa)를 추종하는 사람들로 구성됐다.



    ? 밀라레파(Milarepa, 1052~1135) ― 마르파의 주요한 제자 가운데 하나인 밀라레파(Milarepa)는 티베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성자로 존경받는다. 밀라레파는 마르파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감포파(Sgam-po-pa)에게 전했고, 감포파의 제자들이 까규파에 속했다.



    ? 홍모파(紅帽派) ― 까규파는 모두 6개에 이르는 소종파로 구성돼 있는데, 그 가운데 카르마파(Karma-pa)가 있어서 거기서 분파해나간 것이 홍모파(紅帽派)이다. 즉, 까규파의 한 갈래인 카르마파를 형성한 두 지파 가운데 하나로 다른 한 파를 흑모파(黑帽派)라고 한다.


카르마파는 특이한 전생활불제(轉生活佛制)를 통해 발전해, 까규파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성장, 황모파(黃帽派)와 대립했는데, 그 중에서도 홍모파는 대대로 여러 파를 규합하면서 황모파에 항쟁했다. 오늘날 티베트의 지배적인 종파가 된 겔룩파(Dge-lugs-pa)를 상대로 15세기부터 17세기 초반에 걸쳐 티베트의 세속적 권력 쟁취를 위해 주도권 다툼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홍모파 세력에 몰린 황모파는 몽골 부족인 오이라트[瓦刺]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단숨에 홍모파와 그 배후세력을 쳐부수고 1642년 달라이라마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중국 문헌에서는 황모파 이외의 파를 일반적으로 홍모파로 부르는데, 사캬파 등도 이에 포함시키고 있다.


 

   후기 티베트 불교는 여러 귀족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는데, 사꺄파의 경우 회색 땅을 뜻하는 사꺄(sa skya) 지방의 일족인 ?(’khon) 일족의 종파이다. 사꺄파의 다른 특징으로는 불교 논리학과 중관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사꺄파엔 그 후 유명한 학승들이 배출돼 홍모파 몰락 이후 겔룩파와 경쟁구도를 형성했다.



    ? 최겔팍파(gro mgon chos rgyal ’phags pa, 1235~1280) ― 그리하여 사꺄파는 티베트 정치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몽골의 불교 전통을 만드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1240년 몽골이 티베트를 침략해 샤카파의 최겔팍파를 국사로 초빙해 갔다. 그리고 그에 의해 몽골 문자를 만드는 등 몽골의 문화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최겔팍파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파스파(八思巴)이다.



   이 시기에 발전한 또 하나의 종파는 조낭파(jo nang pa)이다. 이 조낭파는 쉔똥(gzhan stong), 즉 타공(他空) 사상을 내세웠다. 타공(他空)이란 모든 속제를 비롯해 다른 것에 의존해 일어난 현상들, 자아와 같은 허상은 그 자성이 공(空)하지만,


그 모든 속제의 근간이 되는 법성, 일체지, 불성, 또는 청명한 빛의 마음은 공하지 않다는 사상이다. 즉, 만일에 속제가 공하다고 할 때, 그 공성까지도 공하다고 하면 단멸론의 극단에 빠지기 때문에, 불법의 핵심인 중도(中道)를 따르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자공(自空)과 타공(他空)의 분류법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미국 링컨대 야로슬라브 코마로브스키 교수(Yaroslav Komarovski)에 의하면 겔룩파의 사상 가운데에서도 현교를 제외한 밀교 및 모든 티베트 종파의 사상은 타공사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이후 조낭파는 5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 이단으로 몰려 중앙 티베트 지방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종교적 박해를 자공과 타공의 사상적 대립으로 설명을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조낭파가 겔룩파를 정치적으로 박해한 세력과 한 통속이 됐던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런데 조낭파는 5대 달라이 라마의 박해로 모두 사라진 것으로 믿었으나, 몽골과 암도 지방을 중심으로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근자에 밝혀졌다.



    ? 총카파(Tsong kha pa, 1357~1419) ― 겔룩파의 종조이다. 14세기 말, 겔룩파는 총카파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티베트의 4대 종파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성립됐다.


 

이들은 까담파의 전통을 따라 엄격한 계율의 수행을 강조하면서, 불교철학을 바탕으로 단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아띠샤의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의 주석서인 총카파의 <보리도차제광론(菩提道次第廣論)>을 비롯한 많은 주석서 및 저서들은


그 당시까지의 철학과 수행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 내면서 티베트 불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로 까담파의 전통은 점차로 겔룩파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됐다. 이에 총카파의 겔룩파(dGe-lugs-pa)는 신까담파(bka’ gdams gsar ma)라고 불리기도 한다.

 

(3) 티베트 불교의 황금시대(1250~1450)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사꺄파의 중앙 티베트 지배력은 급속도로 약해졌다. 이와 동시에 까규파의 3대 분파 가운데 하나인 팍두까규(원명 팍모두파 까규, phag mo gru pa bka’ rgyud)가 사꺄파를 대신해 중앙 티베트에 세력을 넓혀 티베트의 중심 세력이 됐다(1368~1434).



   총카파와 그의 뛰어난 제자들에 의해 라싸를 중심으로 점차 영향력을 넓히고 있던 겔룩파는 팍두까규의 극심한 견제를 받았다. 이러한 정치 종교적 박해 속에서도 겔룩파는 지속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드디어 겔룩파가 중앙 티베트의 주요 종교 정치의 거점이 된 것은 17세기 초였다.



   그런데 정치적인 혼돈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불교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각 종파가 상호 간의 교류 및 견제를 통해 자신들의 확고한 교리체계를 확립했고, 이 시기 동안의 불교 발전은 이후 티베트 불교의 근간이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파들의 역사적 발전을 살펴보면 종파의 형성과 발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 인도불교의 전기전래(600~850) 시기 ― 구역, 닝마파의 시대

    ? 인도불교의 후기전래(950~1250) 시기 ― 신역, 닝마파, 까규파, 사꺄파, 까담파, 조낭파 등이 활약했다.

    ? 황금기(1250~1450) ― 닝마파, 까규파, 사꺄빠, 조낭파, 겔룩파(신까담파)가 활약한 시기이다.

 

(4)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티베트불교 종파 간의 정치적 대립과 발전에 있어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종파 간의 대립이 마치 종파 간의 극한대립에 따른 교류 단절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각 종파의 정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각 종파의 고승들은 종파를 막론하고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다른 종파의 학승이 자기 종파의 교리를 배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따라서 종파 간의 경쟁적 발전과 더불어 상호의 수행 전통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활발한 교류 및 대화가 티베트 불교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현 14대 달라이 라마도 나로파(1016∼1100)의 여섯 가지 명상 수행법에 조예가 깊다. 또한 5대 달라이 라마는 닝마파 출신이며, 현 14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 가운데에도 닝마파가 있다.



   티베트의 주요 불교 종파 네 가지는 닝마파와 까규파와 사꺄파와 겔룩파이다. 이들 각각은 탄트라를 포함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신봉하는데, 그 이유는 티베트 불자들은 이들 가르침을 구분하지 않으며 모두 똑같이 존중한다. 도덕적 지도를 위해 소승 계율에 따르고 있으며, 모든 심오한 밀교적 수행을 위해서 대승불교와 탄트라 학파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① 닝마파(Rnying-ma-pa) ― 닝마파는 티베트어로 ‘(가장)오래된 종파’를 의미하고, 티베트의 4대 종파 가운데 가장 최초에 성립됐다.


닝마파는 8세기에 티베트에 와서 775년경 삼예(Samye)에 이 나라 최초의 사찰을 지은 유명한 인도의 밀교 승려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의 티베트에서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닝마파는 명상 수행법인 ‘족첸(rDzogschen)’을 최고 수승한 가르침으로 간주했다.


족첸은 일상 속에서 말하고 생각하는 바를 명확히 관찰하는 '닝마파'의 수행법이다. 족(rDzogs)은 ‘완벽한, 위대한’이란 뜻이고, 첸(chen)은 실현이란 말이다.



     ? 론첸파(1308~1364) ― 론체파는 그 족첸의 가르침을 체계화했다. 초기 닝마파는 재가 신도와 승려들로 구성됐다. 그들은 랑달마왕(836~842)의 억불정책 시기에도 그들의 전통을 계승해나갔다. 후에 나타난 새로운 불교의 전통과 구별하기 위해 닝마파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닝마파(古波, 오래된 종파)로 부르기 시작했다.

 

    ② 까규파(Bka’ brgyud pa, 黑帽波) ― 카규파는 티베트어로 <부처님 가르침의 구전(口傳)>을 의미한다. 그래서 말 그대로 사자상승(師資相承)을 강조하는 것이 까규파의 특징이다. 11세기에 재가생활을 하면서 불경의 번역가로 이름을 떨친 위대한 스승 마르파(Mar-pa, 1012~1097)를 추종하는 사람들로 구성됐다.



   이 종파의 핵심적 가르침은 마하무드라(大手印)와 나로파(Naropa, 1016∼1100)의 여섯 가지 교리이다. 이 여섯 가지 교리는 여섯 가지 요가 명상수행을 말한다. 이 가르침은 나로파의 제자 마르파(1012∼1097)에 의해 인도에서 티베트로 전승됐다.


그리고 마르파의 제자 가 밀라레파((Milarepa, 1025~1135)이고, 밀라레빠의 제자인 감뽀파(Sgam-po-pa, 1079~1153)는 그 가르침을 까규파의 전통 속에서 조직했다.

 

「인도의 틸로파(Tilopa, 988~1069) ― 나로파(Naropa, 1016~1100)를 거쳐 티베트인인 마르파(Mar pa) ― 밀라레파(Milarepa) ― 감뽀파(Sgam-po-pa)」

 

   그리하여 위와 같이 까규파를 잇는 법맥이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까규파의 전통은 법신의 화신인 바즈라드하라(金剛持)에서 시작되고, 틸로파(Tilopa)를 거쳐서 나로파에게 전승됐다고 한다.


위대한 번역사 마르파는 나로파의 제자로 사자상승의 전통을 티베트에 전승했고, 그의 제자 밀라레파는 이 전통을 계승하고 그의 제자 감뽀파(Sgam-po-pa)에게 전승했으며, 감뽀파는 까규파의 가르침을 집대성해서 까규파가 독립된 종파로 성립하게 됐다.


한 때는 오늘날 티베트의 지배적인 종파가 된 겔룩파(dGe-lugs-pa)를 상대로 티베트의 세속적 권력 쟁취를 위해 주도권 다툼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라마들이 죽은 후에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다는 주장은 이 까규파의 한 부류인 카르마파(Karmapa)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현재까지 17대 카르마파가 존재하고 있다. 지난 2000년 1월 17세의 나이로 출푸 사원에 있던 제17대 카르마파가 중국의 간섭을 피해 인도로 망명해 다람살라에 머물고 있다. 이 사건은 중국을 자극해 현재까지 양국 간 최대의 정치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현 제14대 달라이라마 이후 티베트 정치 종교 지도자로 제17대 까규파 젊은 수장(라마) 카르마파(Karmapa-Ogyen Trinley Dorje, 오겐 틴래 도제, 1985년생)가 현 달라이라마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다.

 

    ③ 샤까파(Sa bskya pa) ― 샤까파의 종조는 인도 출신 달마팔라(Dharmapala)인데, 꼰촉 갈포(dKon mchog rhyal po, 1034~1102)가 샤까 지방에 절을 세우면서 샤까 사원의 이름에서 기인한다. 아티샤(Ati?a)의 예언에 의해서 그 샤까 사원은 1073년에 건립되고,


그 사원의 주지와 콘 가(家)의 멤버들은 금강승의 핵심 가르침을 전승했다. 샤까파는 밀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불교논리학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13세기~14세기에, 샤까파는 티베트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샤까파는 1092~1280년 사이에 독립된 종파로 다섯 명의 구루에 의해서 발전했다.



   다섯 명의 구루는 사첸 쿵가 닝포(1092~1158), 그의 두 아들인 소남 쩨모(1142~1182)와 드락파 겔첸(1147~1216), 그의 손자 사키아 판디타(1182~1251), 그리고 사키아 판디타의 조카 최겔 팍파(1235~1280)이다. 이 가운데 사키아 판디타의 영향이 가장 컸고, 그의 학문적 평판이 인도에도 널리 퍼졌다.



   최겔 팍파(1235~1280)는 원나라에 가서 쿠빌라이 칸(세조, 1260~1294)의 왕사가 됐다. 최겔팍파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파스파(八思巴)이다. 그에 의해 몽골 문자를 만드는 등 몽골의 문화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원나라는 중앙 티베트 통치권을 샤까파에 수여해 했다. 그리하여 13세기~14세기에, 샤까파는 티베트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④ 겔룩파(dGe-lugs-pa, 黃帽波) ― 14세기 말, 겔룩파가 총카파(1357~1419)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티베트의 4대 종파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성립됐다. 겔룩파는 신(新)까담파라고도 하는데, 그들은 까담파(bKa gDams pa)의 후예임을 자칭하기 때문이다.


 

    ?총가파(Tsong kha pa, 1357~1419) ― 겔룩파의 종조 총가파는 아티샤(Ati?a)의 영향을 받아 방대하고 세밀한 교학의 뒷받침 아래 계율중심의 엄격한 승가 전통을 회복해, 현교와 밀교의 유입으로 혼란한 티베트 불교를 일신했다.


   겔룩은 티베트어로 “덕행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총카파는 문수보살로부터 영감을 얻은 후, 그의 수많은 주석서에서 월칭(月稱, 찬드라키르티/Candrakrti)의 중관학파 가르침을 자기 사상체계에 핵심으로 세웠다. 그는 또한 불교의 수행론을 대단히 강조했다.


그는 발보리심(發菩提心)을 그의 수행론에서 대단히 강조했고, 수행론의 체계에서 지관(止觀)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밀교의 가르침이 마음의 평정심 회복을 위한 특별한 테크닉으로 간주됐다.

 

   이 겔룩파는 아티샤(Ati?a, 982∼1055)의 까담파(bKa gDams pa) 가르침을 충실하게 추종하면서 계율의 준수와 더불어 논서의 체계적인 연구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 가운데, 람림(Lamrim;불교의 수행론)과 다양한 불교의 교리적 견해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 종파의 핵심적인 과제였다.


이 겔룩파는 티베트의 극서 지방에서 동쪽의 암도 지방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제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강쪼(1543~1588)가 몽고를 방문한 후, 몽고의 후원으로 겔룩파는 중앙 티베트에서 지배적인 정치세력이 됐다.


특히 제5대 달라이 라마 카왕 로상 강쪼(1617~1682)는 몽고군의 도움으로 티베트의 종교계와 정치계를 평정했다. 이러한 겔룩파의 절대적인 위치는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겔룩파 사원의 모체는 총카파가 세우고 죽음을 앞두기까지 머물렀던 간덴 사원이다. 그러나 겔룩파의 수장은 전통적으로 라싸 교외에 있는 드레풍 사원의 원장들이 계승해 왔으며,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인정되고 있다. 현재 겔룩파의 수장 텐진?초는 제14대 달라이라마(Dalai Lama)로서 인도 다람살라에서 망명 정부를 이끌고 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