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월산 기림사
함월산 기림사 일주문
기림사
석가모니가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승원 중에서 첫손에 꼽히는 것이 죽림정사와 기원정사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20년이 넘게 머무른 곳이다.
이와 더불어 불자들의 수행도 점차 유랑 위주에서 정착으로 바뀌었고 정사도 점차 수를 늘리게 된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이라 하니 경주 함월산의 기림사는 그런 연유에서 붙은 이름이다.
기림사는 해방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절로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였으나 교통이 불편한 데다 불국사가 대대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사세가 역전되어 지금은 거꾸로 불국사의 말사로 있다.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직후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오백 명의 제자를 교화한 임정사였다는 설화도 있고, 그 뒤 선덕여왕 20년(643)에 원효대사가 도량을 확장하면서 기림사로 개명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치가 않다.
『삼국유사』에 “신라 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용으로 화한 선왕으로부터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얻어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통일신라 초기인 신문왕 이전부터 있던 고찰로 생각된다.
고려 말기에 각유 스님이 이 절의 주지로 있었고, 조선 시대에 와서는 철종 14년(1863)에 대화재로 주요 건물이 불탔으나 경주 부윤 송우화가 크게 시주하여 다시 지었다.
가람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전, 맞은편에 진남루, 오른쪽으로 응진전, 수령 500년이 넘는다는 큰 보리수나무와 목탑자리가 남아 있는 구역이다.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으로 보물 제833호로 지정된 조선 시대 목조건물이며, 그 앞에 유형문화재 제205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근래 새로 만든 석등이 있다.
둘째는 최근 불사한 삼천불전, 명부전, 삼성각, 관음전과 기타 요사채 등이 있는 곳이고 셋째가 박물관이다. 기림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매월당 김시습의 사당도 볼 수 있다. 김시습이 기림사에 머문 인연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사당이다.
기림사에는 다섯 가지의 맛을 내는 물이 유명하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옆의 장군수는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물이고, 천왕문 안쪽의 오탁수는 물맛이 하도 좋아 까마귀도 쪼았다는 물이다.
천왕문 밖 절 초입의 명안수는 기골이 장대해지고 눈이 맑아지며, 후원의 화정수는 마실수록 마음이 편안해지고, 북암의 감로수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다는 물이다. 장군수는 장군의 출현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막아버렸고 다른 네 곳도 대부분 물이 말라버렸다.
기림사 박물관에는 기림사를 대표할 만한 건칠보살좌상과 1986년 9월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에서 발견된 문적(文籍)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들 역시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보물 제959호). 전적들은 모두 54종 71책으로 정교한 판각솜씨를 보이고 있다. 그 밖에도 지옥과 염라대왕을 묘사한 탱화, 부처님의 진신사리, 와당, 각종 서책 등이 즐비하다.
이렇듯 많은 유물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기림사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림사가 있는 함월산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로 전쟁이나 기타 재화(災禍)를 면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기림사 주위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 계곡을 따라 500m쯤 거슬러오르면 두 암벽의 벌어진 틈새로 시원한 물줄기가 내려치는 용두연이 나선다. 이 폭포 부근이 야영이나 취사하기 알맞은 장소이며, 용두연과 기림사 중간쯤에 있는 선녀탕에서는 물놀이를 즐길 만하다.
용두연이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이곳에서 쉬다가 동해의 용에게 받은 옥대고리 하나를 냇물에 담그니 그것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에 있다. 경주 시내에서 4번 국도를 타고 추령터널을 지나 감포 쪽으로 가다가 안동리 입구에서 왼쪽 포항으로 난 시도로를 따라 4.5㎞ 가량 들어가면 된다. 기림사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다.
경주 시내에서 기림사까지는 시내버스가 하루 4회 다니나, 운행횟수가 많지 않으므로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약 30분~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감포나 양남행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양북면 소재지인 어일리에서 내려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어일리나 안동리에서 내려 기림사까지 걷기엔 거리가 좀 멀다. 기림사 주변에는 숙식할 곳이 몇 군데 있다.
알찬 답사,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① 기림사 경내 목탑자리에는 500여 년 된 보리수나무가 있다. 기림사 사무실에서는 이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② 기림사 박물관은 비가 오는 날에는 건칠보살좌상의 보호를 위해 문을 열지 않는다. 박물관은 평소 문이 닫혀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종무소에 문의하면 열어준다.
건칠보살좌상
‘건칠보살’이라는 것은 건칠, 곧 옻칠을 입힌 종이부처인데 이렇게 만들어진 불상은 아주 드물다. 높이는 91㎝이며 최근에 금색을 다시 입혀 낡은 맛은 없다.
왼발은 대좌 위에 얹고 오른발은 대좌 밑으로 내렸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을 약간 뒤로 하여 대좌를 짚고 앉았는데,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머리에는 당초문을 섬세하게 새긴 보관을 썼으며 얼굴은 복스럽게 살졌으나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 가닥의 목걸이에 매달린 화려한 장식이 특징적이며, 특별한 장식은 없으나 세련되고 아름다운 옷자락이 인상적이다.
대좌에서 발견된 글귀에 따르면 연산군 7년(1501)의 작품이라 하나 대좌의 기록이 반드시 제작 연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의상과 인상이 조선이나 원나라의 불상에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양식을 따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조선 시대의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보물 제415호이다.
대적광전
기림사의 본전으로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어졌으며, 그 뒤 여섯 차례나 다시 지어졌다. 현재의 건물은 양식상으로 인조 7년(1629) 다섯번째 지어진 건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 뒤 1786년 경주 부윤 김광묵이 사재를 털어 다시 지었으며 그 건물이 오늘에 이른다. 1997년 5월 완전 해체한 후 다시 지어 고색창연한 맛은 덜하다.
대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배흘림기둥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이 단정하다. 겉모습은 본전건물다운 웅건함을 갖추었으며, 내부는 넓고 화려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대적광전이라 쓴 현판은 글씨가 현판 밖으로 넘쳐날 듯 굵고 힘차며, 앞면에는 모두 꽃창살 문을 달아 화려하다.
넓은 전각 안은 장엄한 맞배지붕 건물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며, 거대한 소조비로자나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보물 제833호이다.
소조비로자나 삼존불
가운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노사나불 그리고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셔 삼존불을 이루는데, 흙으로 빚은 이 세 불상은 손의 위치와 자세만 다를 뿐 표정과 자세가 거의 같고 옷주름까지도 비슷하다. 노사나불 앞에 최근에 만들어놓은 앙증맞은 탄생불이 있어 그 규모가 대비된다.
상체는 장대하나 무릎이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에는 강인한 표정이 엿보인다. 적절한 두께로 주름을 새겨넣은 옷자락 표현이 장대한 몸체에 잘 어울리는데, 왼쪽 무릎 위로 접어올린 옷자락이 비로자나불만 살짝 한 겹 더 접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만 삼존불일 경우 좌우 부처들이 두 손을 서로 대칭되게 한쪽씩 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은 둘 다 오른손을 들고 있는 것이 색다르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볼 때 보물 제958호로 지정된 대적광전내 소조삼존불은 임진왜란 직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986년 이 비로자나불상에서 고려 시대의 사경(寫經)을 비롯한 수많은 복장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보물 제959호로 지정되어 기림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림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초판 1994., 개정판 23쇄 2012., 돌베개)
기림사연혁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함월산(含月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한다.
신라신문왕은 대왕암(大王巖)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의 서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으며, 고려 말의 각유(覺猷)는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
그 뒤 1578년(선조 11)에 축선(竺禪)이 중건하였고, 정조 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희사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 13)에는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재가 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 송우화(宋迂和)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복원하였다.
그 뒤 1878년(고종 15)의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慧訓)이 다시 중수하였다. 31본산시대에는 월성군 일대를 관장하였으나, 현재는 불국사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전, 서쪽에 오백나한전과 정광여래사리각(正光如來舍利閣)인 삼층전(三層殿)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무량수각과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應眞殿), 앞쪽에 진남루가 사각의 성지를 이루고 있고, 뜰에는 삼층석탑과 새로 조성한 석등이 있다.
조금 떨어져 명부전·삼성각·관음전·산신각·주지실·종무소·요사채·산문(山門)·창고 등이 있으며, 특히 대방(大房)은 2동이 모두 중후하다. 그 밖에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이들 당우 중에서 대적광전은 절의 본당으로 내부에는 전단토상(栴檀土像)의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중원(中原)의 장인이 조성하였다 하며, 불상 조성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1986년 9월에 가운데 주존불의 복장에서 『대반야경』 등 금·은 사경 14권과 조선시대에 만든 불경,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등이 발견되었다.
또, 약사전에는 약사삼존상과 사천왕상, 사라수왕(沙羅樹王)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탱화는 기림사 창건의 연기설화를 보여 주는 특이한 불화로서 근래 이를 모사하여 다시 그렸다. 이 밖에도 응진전 안에는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15호로 지정된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과 목탑지(木塔址)·석조치미(石造치尾)·문적(文籍)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석조치미는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화문(花紋) 장식이 있으며,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문적 중에는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부호장생생가(府戶長生生家)』 등이 있다.
이들은 경상도와 경주의 행정에 관한 것과 행정관에 대한 인적사항, 신라 이후의 지방제도의 변혁 등을 기록한 중요한 문헌들이다.
또, 이 절에는 조선 역대 왕들의 어필도 보관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석비 모양의 나무에 사적을 기록한 목비가 전한다.
이 절에는 원래 오정수(五井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 중 장군수(將軍水)는 마시면 힘이 용솟음친다 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졌는데, 조선시대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나한전 앞쪽 탑 자리에도 샘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또 하나는 절 입구에 있었으나 최근 도로확장 때 매몰되었으며, 현재는 큰 방 옆과 아랫마을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 절에는 또한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라는 한약초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한방서에도 그 기록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림사 [祇林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천왕문
동방 지국천왕과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과 북방 다문천왕
범종루
'사찰순례 > 108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능가산 내소사-1(16.7.16) (0) | 2018.06.20 |
---|---|
능가산 내소사-2(16.7.16) (0) | 2018.06.20 |
함월산 기림사: 진남루, 응진전, 약사전(16.7.8) (0) | 2018.06.20 |
함월산 기림사: 대적광전, 관음전(16.7.8) (0) | 2018.06.20 |
함월산 기림사: 삼천불전, 삼성각(16.7.8) (0) | 2018.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