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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파키스탄 여행기 5 "훈자를 생각한다"

정혜거사 2017. 6. 6. 21:47

 

 

 

 

 

중국 카스-파키스탄-인도 여행기 10 (파키스탄 5)

 

"훈자를 생각한다"

 

 

 <강의 아래 쪽이 나가르 지역. 카이 지역이 아이들이 몰려든 지역>

 

 

우리가 묵고 있는 카림 아바드의 힐탑 호텔 옥상에 올라가 보면 훈자강 건너편에도 마을이 보인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나가르(Nagar) 마을이라고 했다. 우리가 나가르 마을을 찾아 갔을 때, 마침 점심 때가 되어 식당을 찾으니 식당이 없었다. 여기저기 물어 찾아 간 곳이 우리 나라 시골의 새마을 회관 정도 되는 식당 겸 매점이었다. 각자의 집에 TV가 없어서 인지, 약 20명의 사람들이 좁은 홀에 빽빽하게 모여, 뒤가 툭 튀어 나온 구식 텔리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메뉴를 보니 마땅히 먹을 음식이 없어서, 빵과 쥬스를 시켰다. 종업원 한 명은 허름한 진열대에서 빵을 가져오고,  또 다른 종업원은 바람처럼 밖으로 나가서 쥬스를 사왔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은 내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텁텁한 공기에다가 많은 사람들의 열기까지 겹쳐서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빵과 쥬스가 어디로 넘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 벽에 히잡을 두른 여인의 사진이 있어서, "저 여자가 수니파일까 시아파일까?", 라고 누가 말을 하자, 우리를 태우고 갔던 기사는 깜짝 놀라며, 그런 이야기를 일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근처에 있는 길기트라는 도시에서 시아파와 수니파간의 분쟁으로, 툭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한다. 그렇게도 평화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총을 드리대니, 이해하기 힘들다.   

 

 

 

 

강가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밭에서 일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텅빈 들판에는 더운 바람만이 유령처럼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파란 하늘과 구름을 배경으로 빨래줄에 펄럭이는 빨래가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의 만국기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유치환의 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하자 어디서인지 모르게 아이들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문명의 혜택을 거의 받을 수 없고, 외국인을 볼 수 없는 그들에게 우리는 흥미진진한 몇 마리의 원숭이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포즈를 취해 주면서 마음껏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강의 합류 지점이 잘 보이는 산 등성이에 올라가서, 저 밑에 흐르는 강물과 그 건너 카림 아바드를 바라보니, 장쾌한 훈자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흔들리는 구름과 그 아래 퍼렇게 펼쳐진 산이 시네마스코프 영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대 자연을 바라보는 내가 한 없이 작아 보였다.  그 자연과 그 자연을 벗삼아 사는 사람들이 신처럼 위대해 보였다.

 

 

 

 

 

 

동네 아줌마들이 숨어서 우리를 관찰하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집 모퉁이에 숨어서 우리를 바라볼 때, 그들의 얼굴을 두르고 있는 히잡이 반쯤 보였기 때문이다. "Hello, how are you?"라는 나의 말에 여인네들은 하던 일 중단하고 허겁지겁 모퉁이로 사라졌다.

 

 

훈자보다도 훨씬 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한 아이들이, 순식간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돌로 쌓아둔 수로 위에서 우리를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 작은 동네에 무슨 아이들이 저리 많은지 모르겠다. 마을의 가구수로 아이들을 나누어 보면 한 집에 4-5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혹시 다시 북 파키스탄에 다시 온다면, 훈자를 찾을 것이 아니라, 여기 나가르에 와야 한다고 K형은 한 마디 했다. 때묻지 않은 그들의 모습이 1950년대 우리의 삶과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훈자 마을을 거닐다.

 

 

 

 

훈자 마을은 어디를 가나 녹색 지대다. 마을 중간에 수로가 있고, 수로를 연결하는 또 다른 수로가 있다. 수로 옆길은 모래로 되어 있어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모래성을 쌓거나, 모래 위에 글씨를 쓰기도 하고, 축 늘어진 나무에 올라가 땅 바닥으로 뛰어내리기도 한다. 나에게 다가와 사진을 찍어 달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나를 보면 울면서 줄행랑을 치는 아이도 있다.

 

 

 

 

 

 

 

 

아이가 많은 어떤 집을 지나가고 있었다. 들어오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방에 여자 6명이 앉아 있고, 한 쪽에 남자 한 명이 누워있었다. 나는 이 6 명의 여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다. 남자는 노인으로 환자인 듯 했다. 몇 마디 말을 해보았으나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서, 곧 밖으로 나왔다.  

 

 

 

 

 

 

 

 

 

 

 

 

 

 

 

 

울타르 산 위로 태양이 뜨고 있다. 눈부신 태양은 훈자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미루나무와 살구나무 위에 빛을 뿌릴 뿐만 아니라, 들판에 자라는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에게도 잊지 않고 자신의 일부를 나누어 주어 무럭무럭 자라게 한다. 저 태양은 5월의 풀 위에 맺힌 아침 이슬을 거두어 가고, 또 자신을 숨겨 밤을 만들고, 또 다시 풀 잎에 아침 이슬을 맺히게 한다.

 

 

 

 

 

 

 

 

 

한 집에 초대되어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넓은 집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벽은 "우리는 행복한 집안입니다"라고 말하는 듯, 가족 식구의 사진과 꽃이 적절히 장식되어 있었다. 넓은 방에 입구(口) 모양으로 음식을 차려 놓았고, 가운데는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 주인은 그 가운데 빈자리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음식을 마음껏 들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방의 다른 한 구석에 그집 아이들이 마치 식당의 종업원처럼, 우리의 요구에 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음식이 놓여있었는데, 반의 반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아야 했다. 주인은 계속해서 더 들도록 권유했지만, 술이 없는 아쉬움 때문일까, 음식이 낯설어서 일까, 남은 음식이 먹은 음식보다 더 많은 듯 했다.

 

 

 

 

 

 

 

 

 

 


 

 

 

근처 동네 축제에 한국인들을 초대한다는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치자면, 금산의 인삼 축제처럼 그 고장의 연례 행사 중의 하나인 축제인 듯 했다. 백파이프와 북을 연주하며 악대가 몇 번 왔다갔다 했다. 그 뒤를 이어 한국의 사물놀이와 비슷한 악단이 신명나는 연주를 했고, 자진해서 인지 아니면 뽑혀서 인지, 평범한 사람들이 얼씨구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뒤에 나이 먹은 할아버지가 흰색 도포를 입고, 아리랑 춤 비슷한 요상한 춤을 추자,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사람들이 노인의 모자에 돈을 꽂아 주었다. 그러자 그 노인은 그 돈을 길거리에 앉아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에세 건네 주었다.

 

 

 

 

 

 

 

 

 

 

 

 

 

한국인 관광객이 이 행사를 축하해주기 위해 참석했다라는 방송이 들리고, 한국 사람들은 나와서 춤을 춰달라는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좀, 아니 아주 대단히, 뻘쭘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춤을 춰야하는 팔자인지 신세인지가 되고 말았다. 대낮에 운동장에서 낮술없이도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롭기만 했다. 우리가 추는 춤은, 포로가 끌려가면서 넋두리 하는 듯 하기도 하고, 할 일 없는 시골 노인들이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지난 삶을 후회하는 듯한 탄식을 하면서 손사래 젓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튼 내 생애 이렇게 어색한 춤은 처음 춰봤다. 차라리 지루박이라면 조금은 훈자 사람들의 넋을 빼놓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작은 광장 주위에는 각종 전을 포함한 갖가지 음식을 팔고 있었다. 시골장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막걸리 얻어 먹듯, 나는 동료들이 사서 건네주는 음식을 덥썩덥썩 받아 먹었다. 훈자 전통 음식을 먹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으며,   음식 파는 아가씨들의 얼굴을 보는 기쁨은 덤이었다.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파키스탄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들의 얼굴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파키스탄 여자들은 남편 이외에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여자 얼굴 찍는 것에 혈안이 되었던 우리는, 비로소 오늘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진을 찍은 것은 아니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나의 카메라를 주고, 네가 찍고 싶은 대로 마음껏 찍어봐라, 라고 말하자 그는 바람처럼 사라져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 50장의 사진을 찍어왔언 것이다. 여기에 실린 여자 사진은 대부분 그 소년이 촬영한 것이다.

 

 

 

 

 

 

<길에서 만난 소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 라호르 대학생이 와서 2박 3일간 묵고 간 적이 있다. 그들의 나를 보자 첫 마디는 "파키스탄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느냐?(Do you think Pakistan is dangerous?) 였다. 한국에 있을 때 파키스탄이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와보니 평화롭게 느껴진다고,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열변을 토하듯, 파키스탄이 위험하다는 것은 서양 언론 때문이라고 성토하듯이 말했다. 현실과는 관계없이, 파키스탄에 가면 죽을 수 있으니 가지 말라고 서양 언론이 분위기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사실 파키스탄에는 외국 관광객이 거의 없다.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파키스탄이 살길은 관광객이 와서 뿌리는 돈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서 머문 약 20일 동안, 내가 본 서양인은 딱 2명이 전부였다. 그들은 카나다인이었다. 파키스탄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나서서 파키스탄은 평화를 사랑하고, 살기에 안전하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그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실제야 어떻든 사방에 총을 든 군인이나 경찰이 즐비하고, 툭하면 검문을 하고, 아무 데나 함부로 가서는 안된다고 하니, 누가 무서워서 마음대로 거리를 다닐 수 있겠는가? 파키스탄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보다, 가보지 않은 사람이 파키스탄을 더 무서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파키스탄에 가면 툭하면 납치당하고, 여자들은 잡혀가서 노예처럼 살고, 재수 없으면 살해당한다"는 말이 지금 인터넷에 난무하고 있다. 누군가 확실한 파키스탄의 지도자가 나타나, 라카포시 산처럼 깨끗하고, 라카포시 목장처럼 평화로운 파키스탄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 그래서 관광객으로 들끓어 그들의 삶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묵은 힐탑 호텔>

 

 

<한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간단히 한국을 소개했다>

 

 

 

 

 

 

2012년 5월 30일 길기트를 향해 훈자를 떠나면서 일 주일 동안 정들었던 힐탑 호텔을 뒤돌아 보았다. 본래가 관광객이 많지 않은 이 호텔로부터 우리가 떠나고 나면, 텅빈 호텔에 찬바람만 썰렁하게 불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붉은 태양이 앞  설산에 황금빛 광선을 뿌리고 있었다. 저 황금 빛처럼, 멀지 않은 장래에 훈자가 관광객의 천국으로 옛 명성을 되찾아 관광의 황금시장이 되기 기대해 본다.  

 

 

<훈자의 마지막날 아침에 찍은 사진>

 

 

(2012년 8월 10일 작성)

출처 : 투어인케이씨-자유배낭여행동호회
글쓴이 : 알바트로스(곽영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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