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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파키스탄 여행기 3 "훈자의 성(城)과 이글스 네스트 호텔"

정혜거사 2017. 6. 6. 21:42

 

 

중국, 파키스탄, 인도 여행기 8

파키스탄 여행기 3

 

"발티트 포트, 알티트 포트, 이글스 네스트"

(Baltit Fort, Altit Fort, and Eagle's Nest Hotel)

 

 

 

 

 

 

훈자 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마을과 마을 사이, 그리고 길과 길 사이에 있는 살구나무와 미루나무일 것이다. 길의 일 부분은 포장이 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비포장이다. 여기에 듬성듬성 보이는 초록의 밭이 있고, 골목에는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수시로 지나다니고, 그 틈 사이로 아이들이 지나고, 염소가 지나가며,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본다. 담 너머로 외양간 안의 동물이 보이고, 널어 놓은 빨래가 보이고, 그리고 풀을 베어 덮어 놓은 마당이 보인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바라보며 웃음짓는다. "Are you Chinese? Are you Japanese?" 아마 한국인보다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많이 훈자를 여행한다는 뜻이리라.

 

 

 

 

 

 

 

훈자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아마도 발티트 포트(Baltit Fort)일 것이다. 로운리 플래니트에 따르면, 이 성은 13 세기에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그 뒤에 집과 탑이 증설되었다. 가장 획기적인 것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성의 돌을 하나하나 분리했다가 다시 조립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입구에서 표를 구입하여 안내자를 따라서만이 안에 들어갈 수 있고, 내부 사진을 찍으려면 다시 돈을 지불해야 한다.

 

 

내부에 식품 저장실, 거실, 화장실, 포병실, 경비실, 접대실, 감옥 등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춘 이 성은, 왕이 생활하기에 편리하고 적을 막기에 효과적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가 본 이 성은 답답하기 그지 없는 성이었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꼈을 이 좁은 성에서,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고립시키켜 평생을 지냈을 왕을 생각하면 부럽다기 보다는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왕국은 적어도 고구려, 백제, 신라 정도는 되어야 할터인데, 훈자왕국이 우리나라 면 단위의 면적인 것을 생각하면, 그 당시 훈자왕은 현재의 면장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하기야 면장이 이 정도의 성에서 살면 적절히 사는 삶이었을 지도 모른다.  

 

 

 

<발티트 성>

 

<성의 내부>

 

 

<성에서 바라본 훈자 계곡>

 

 

<성의 옥상>

 

 

<우리를 안내했던 발티트 성 안내자>

 

 

 

    

역사나 유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쪽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별로 없는 나로서는, 발티트 성은 그다지 흥미를 끄는 건축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관심을 끄는 것은 동네 공동묘지였다. 넓고 황량한 공동묘지에는 죽은자의 돌무덤이 바닥에 낮게 깔려있었다. 이 묘지에는 누군가가 갖다 놓은 몇 송이 꽃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으며, 밤에는 찬 바람과 이슬을 맞고 있었고,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빛을 받으며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고 있었다.  

 

 

나는 훈자에 있는 일 주일 동안, 매일 새벽이면 이곳에 나와 사진을 찍었다. 여기에 서 있으면, 앞에 있는 거대한 산과 계곡 그리고 뒤에 있는 산이 구름으로 뒤덮였다가 맨살을 들어내고 유령처럼 사라졌다. 구름이 머물던 자리에  바람이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죽은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자니  나 또한 또다른 사자(死者)였다. 이 세상의 삶이 아침이슬에 불과하다면, 내 남은 인생도 저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순식간에 없어질 이슬이다. 계획을 세워서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는 일도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 남겨진 호랑이 가죽도 곧 썪어 없어지고, 죽은 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이 세상에서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 인간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덤에서 조금만 눈을 들어보면, 거기 훈자의 매력에 빠져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어둠의 장막을 뚫고 적군의 군화발처럼 시시각각 다가오는 아침 태양에 의해 대 자연은 굿거리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다. 오묘하게 변하는 색깔, 이상과 현실을 오가는 채도의 변화, 생멸을 보여주는 빛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심오한 빛의 향연 속에 넋놓고 바라보는 나는, 마치 천국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성자(聖者)처럼 가슴 벅찬 희열을 맛본다. 아, 이게 바로 신이 내린 빛이련가!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이상향이던가?

 

 

 

 

 

 

 


 

<알티트 포트 가는 길>

 

 

 

 

 

 

 

알티트 포트 가는 길에 한 학교가 눈에 띄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학교에 들어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교실에 들어가봐도 좋은지 물었다. 놀랍게도 선생님은 우리를 자기가 가르치는 반에 들어가 보도록 허락했을 뿐만아니라, 다른 선생님의 수업도 참관하도록 도와 주셨다.

 

한국의 교실보다는 좀 좁은 교실에는 허름한 책상이 놓여있었고, 벽에는 갖가지 그림이 붙어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맑았으며, 입가에는 수줍음의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약 10분이 지난 후, 선생님은 더 있다 가라고 했으나, 수업을 방해하면 안될 것 같아 학교를 빠져 나왔다.

 

그후 알티트 포트로 가는 길 내내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길에 그려졌다 지워졌다를 반복했다. 그저 행복하게만 보이는 저 아이들이 장차, 힌두교와 이슬람으로 나뉘고, 이슬람은 다시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서 서로 총을 겨누는 비극적 삶을 살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 세상 모든 악행은, 결국 그 씨앗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어른들이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알티트 포트,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마을이다.>

 

 

알티트 포트는 훈자강변에 높게 건축된 성이다. 밑을 바라보면 어질어질하다. 어차피 적이 훈자강의 절벽을 타고 오르지는 못할테니까 경비병의 역할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장기에서 왕이 죽으면 장기 시합이 끝나듯, 옛날에는 왕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토록 위험한 곳에 성을 건설했나 보다.

 

 

안내자를 따라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흥미로운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바닥에 조그만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소변과 대변을 보면 그 아래에는 죄수들이 있어서 똥과 오줌을 뒤집어 쓴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죄수들의 입장이, 우리 나라 제주도의 똥돼지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성벽에서 약 2미터 떨어진 곳에, 약 30cm × 50cm 되는 면적의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에서 떨어지면 100미터 이상의 절벽 아래로 떨어지니까 인간의 탈을 쓰고난 자는 무조건 죽게된다. 그 바위로 뛰어내렸다가 다시 성벽으로 올라오는 사람은 왕의 경비대원으로 삼았다고 하니, 경비병이 되기 위해 모험을 했던 병사들의 시체가 훈자강을 메우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저 바위로 뛰어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병사는 경비병으로 특채한다.>

 

 

<알티트 마을>

 

 

<오른 쪽에 알티트 포트가 보인다.>

 

  

<우리의 가이드>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 알티트 포트 구내에 식당이 있었다. 깔끔하고 가지런하게 차려진 식당이 연노란 불빛에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식당의 종업원은 6명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모두 20대 - 40대 처녀 또는 아줌마로 보였다. 그들은 식당의 종업원이 아니라,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연예인처럼 보였다. 장구와 북을 두드리고 얼씨구 춤을 추면서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여기가 파키스탄인지 조선시대 선술집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웃고 떠들고 박수치고 개다리 춤을 추면서, 훈자의 오후가 아지랑이 되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음식을 먹는지 마는지도 몰랐고, 설령 먹었다 해도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오는지 몰랐다. 술도 없이 이렇게 잘 놀 수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래 살기도 살았지만, 그래도 나는 더 오래 살고 볼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종업원들을 찍었다. 사진틀 속에 있어서 사진인지 벽에 걸어 놓은 액자인지 불분명하게 보인다>

 

 

 

 

 

 

 

<알티트 포트 동네 아이들>

 

 

<가정 집>

 

 

<골목을 누비고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이글스 네스트 호텔에서 1박

 

 

이글스 네스트(eagle's nest)는 우리가 묵은 힐탑 호텔에서 걸어 약 2 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산 꼭대기에 있는 호텔이다. 힐탑 호텔에서 고개를 넘은 후, 약간 경사가 있는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높은 고도에 있기에 추위가 빨리 찾아와 3월에서 10월까지만 영업을 한다.

 

 

<이글스 네스트 근처 도로>

 

 

이글스 네스트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면 펑퍼짐한 들판이 나타나고 여기저기 일하는 농부들이 보인다. 밭에서는 주로 여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들을 힐끔힐끔 바라보듯 그들도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여자들의 사진을 찍어서는 안된다는 이 나라 습관 때문에 그들을 찍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럽기까지 하다.

 

 

<이글스 네스트에서 바라본 훈자 강과 그 주변>

 

 

그날 마침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약간은 쌀쌀한 날씨 속에 먼 훈자 마을이 손에 잡힐 듯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글스 네스트에서 바라보는 훈자강과 훈자 마을은 그야말로 신선이 노니는 그런 풍경이다. 검푸른 숲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훈자강, 그 위에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웅장한 구름 무리, 가끔가다 나타나는 이름 모를 새들이 그 위를 훠어얼 훠어얼 이리 날고 저리 난다. 구름은 석탄을 태우는 기차의 연기처럼 무리를 지어 뻗어 있고, 새끼 구름이 그 주위에 장난을 치다가 엄마 품에 들어가는 병아리처럼 큰 구름 아래로 꼬리를 감춘다.

 

 

<이글스 네스트 근처 마을>

 

 

동네에 들어가 보았다. 한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할머니는 양동이에 들어 있는 찬물에서 시커먼 양털을 씻어 광주리에 담고 계셨다. 나를 보던 할머니는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지 문은 닫혀있고, 문 밖에 신발이 없었다. 나는 한 동안, 반쯤 오그라든 시커먼 할머니의 손을 바라보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삶이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할머니는 혼자 사시는 듯 했다. 나무 껍질을 담아둔 광주리, 그 옆에 놓여진 하얀 국물이 든 냄비 옆에, 할머니가 사용하는 지팡이가 벽에 기대어 놓여있었다.

 

 

<할머니 집 마당>

 

 

<할머니는 양털을 찬물에 씻어 광주리에 담고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간다>

 

 

<찬물로 된 냉장고. 우유를 넣어 놓았다.>

 

 

땅 속에 웅덩이가 있어 신기해 바라보니 그  속에 줄에 매달아 놓은 우유 병이 담겨져 있었다. 말하자면 자연 냉장고인 셈이다. 할머니가 사시는 방에 들어가도 좋은지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가 옛날 우리 할머니처럼 인자해 보였다.

 

 

<할머니가 사는 방 내부: 땔감과 난로겸 아궁이가 있다.>

 

 

할머니가 사시는 방 한 구석에 땔감이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난로 겸 아궁이가 놓여있었다. 할머니는 냄비 뚜껑을 열더니 그 속에 든 짜파티를 따라주며 나보고 먹으라고 시늉했다. 할머니가 끓여주는 짜파티는 할머니의 검고 쭈글쭈글한 피부처럼 따뜻했고, 숭늉처럼 깊은 맛이 있었다.

 

 

할머니는 방 한 쪽을 가리키더니 머리에 손을 갖다대고 자기가 자는 침대라고 말하는 듯 했다. 노끈을 매달아 횃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옷을 척척 걸어 놓았다. 그 아래 두툼한 이불이 몇겹 쌓여 있었고, 큰 베개가 포개져 있었다. 온돌이 아닐텐데 방바닥에는 채소를 말리고 있는 것을 보면, 비를 피해 썩지 않도록 조처를 취하는 듯이 보였다.

 

 

내가 영어로 몇 마디 하자,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이심전심의 대화지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었다. "할머니, 혼자 사셔?" 나는 한국말로 말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아들 딸 다 어디 갔어?" 이 말에도 할머니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나를 보더니 할머니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웃고 할머니도 웃었다. 

 

 

짜파티 값으로 약간의 금액을 지불하려고 하니 할머니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가 어떻게 할머니의 손을 만져보게 되었다. 할머니의 손은 거북등처럼 딱딱했으며,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손이 트고 상해있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는 나를 따라 나왔다. 작별을 고하고, 나는 내가 가야할 길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할머니가 보고 싶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보자기를 쓰고 양동이를 든 할머니의 모습이 흐려진 내 눈에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할머니가 주무시는 침대. 바닥에는 채소를 말리고 있다.>

 

 

<밖에서 본 할머니 집>

 

 

<할머니>

 

 

<이글스 네스트 커피 숍>

 

 

 

 

<이글스 네스트에서 바라본 레이디스 핑거>

 

 

<이글스 네스트 식당>

 

 

이글스 네스트에 밤이 왔다. 멀리 레이디스 핑거(lady's finger) 산 봉우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K 형은 그 봉우리를 죽순봉이라고 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의 손가락"보다는 "죽순봉"이 더 그럴듯했다. 저것을 여자의 손가락이라고 이름 붙인 그들의 사고 방식이 궁금 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란 문화 배경이 사람의 생각을 이렇게 바꿔 놓은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밤의 레이디스 핑거>

 

 

훈자에서 몰래 가지고 올라온 오디 술이 한 잔 짜르르 목을 간지리며 들어갔다. 그러다가 심심하기도 하고 좀 춥기도 해서 그저 부어라 마셔라 했을 것이다. 멀리 죽순봉에 구름이 서서히 올라 오더니 이내 봉우리를 덮고 말았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술은 오르고,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러자 호텔에 켜 놓은 등불이 산 중턱에, 그리고 산 봉우리에 두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내 마음도 등불을 따라 공중에 떠돌더니 두둥실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술기운과 어두움과 그리고 검은 산에 떠도는 노란 불빛을 따라 내 마음도 먼 샹그릴라를 향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아까 본 할머니와 나를 키워주닌 우리 할머니 그리고 훈자의 강산이 어우러지고 일그러져 눈 앞에 아롱거렸다. 그리고 수십년간 불러본 적이 없는 "사공의 그리움"을 나는 흥얼거리고 있었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 간다.

물맑은 봄바다에 배 떠나간다.

이 배는 달맞으러 강릉가는 배

어기야 디여라 차 노를 저어라."

 

 

<산 중턱에 떠 있는 이글스 네스트의 등불: 유리창 밖에서 건물 안쪽을 찍었다. 건물 안에 있는 등불과 먼 산이 동시에 찍혀서, 등불이 산 중턱에 떠 있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2012년 8월 8일 작성)

출처 : 투어인케이씨-자유배낭여행동호회
글쓴이 : 알바트로스(곽영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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