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2착륙 1632 버스출발 시내 무후사로
날씨가 더워서 버스에서 환복
1740 무후사도착
전에 보았던 유물관은 공사중으로 문을 닫음
제갈공명 부채, 수레 등은 보지못함
성도공항에서 무후사 가는길
성도공항에서 무후사 가는길
청두[ Chengdu , 成都(성도) ]
- 요약 중국 쓰촨성[四川省]의 성도(省都).
위치 | 중국 쓰촨성 |
---|---|
경위도 | 동경104°04′00″, 북위 30°39′49″ |
면적(㎢) | 12,132 |
시간대 | UTC+8 |
행정구분 | 9구, 4시, 6현 |
홈페이지 | http://www.chengdu.gov.cn/ |
인구(명) | 14,047,625(2010년)
|
쓰촨분지 서부, 청두[成都] 평원 중앙에 있다. 연평균온도는 16.3℃이고, 1월 평균온도는 5.6℃이며, 7월 평균온도는 25.8℃이다.
연강우량은 967mm이다. 약칭은 룽[蓉]이며 서남지대의 중공업기지이다. 쓰촨성의 행정, 경제, 교통, 문화 중심이다.
전국시대부터 있어온 도시로, 춘추전국시대에는 촉(蜀)의 수도였다. 진(秦)·전한(前漢) 때는 촉군(蜀郡)이 관할하는 청두현[成都縣]이 설치되었고,
후한(後漢) 때에는 이저우[益州]의 통치도 겸하게 하였다. 삼국시대 때 유비(劉備)가 촉한을 통일하고 이곳에다 수도를 건립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촉한(蜀漢)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으며 당(唐)의 현종(玄宗)은 안사의 난 때에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수당(隨唐) 시대 때는 창안[長安], 양저우[揚州], 둔황[敦煌]과 같이 4대 도시였다. 옛날부터 방직업이 발달되었고, 1928년에 성도가 설치되었다.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시되어 청대에는 쓰촨 총독 및 청두 장군을 이곳에 두었고, 중화민국 정부가 들어선 뒤 1930년에 시제를 실시하였다.
부근에는 사적이 풍부한데 그 중에서도 제갈 량(諸葛亮)을 모시는 무후사(武侯祠)를 비롯하여 두보초당(杜甫草堂)·망강루(望江樓) 등이 있다.
항공, 전자, 강관, 제약, 면방직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농산물로는 유채, 참깨, 목화, 사탕수수 등을 산출한다.
바오청철도[寶成鐵道], 청위철도[成兪鐵道], 청쿤철도[成昆鐵道]와 108번, 213번, 317번, 318번, 319번, 321번 도로와 충칭[重慶]으로 가는 고속도로 등이 연결된다.
바오청[寶成]·청위[成渝]의 2개 철도와 민장[岷江]의 수운에 의하여 수륙교통의 요충을 이루며,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하다.
비단·칠기 등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중국 8대요리 중에 속하는 쓰촨요리가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교육기관에 쓰촨대학, 시난[西南]사범대학, 농업대학, 전문기술학교, 건축공정대학 등이, 관광지에 성립(省立)박물관, 다쭈석각[大足石刻], 남 온천공원, 두보초당(杜甫草堂)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두 [Chengdu, 成都(성도)] (두산백과)
성도공항에서 무후사 가는길
성도공항에서 무후사 가는길
성도공항에서 무후사 가는길
성도공항에서 무후사 가는길
성도공항에서 무후사 가는길
무후사
청두 무후사[ 成都 武侯祠(청도 무후사) ]
- 요약 중국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 있는 사당.
한소열묘(汉昭烈庙)라고도 한다. 유비와 제갈량의 제사를 모신 사당으로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북쪽에 위치한 본당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해 하나의 축을 이루는 구조이다.
본당 아래에 따먼[大門,대문], 얼먼[二門, 이문], 유비전(刘备殿), 꾸어팅[过厅,과청], 제갈량전오중(诸葛亮殿五重)이 있다.
서쪽에는 유비의 묘(刘备陵园)가 있으며, 얼먼에서 유비전과 동서전(东西殿), 꾸어팅에서 제갈량전(诸葛亮殿)의 동서방향으로 각각 두 개의 곁방이 붙어있는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사당 내부에는 촉한(蜀汉 : 삼국의 하나로 유비가 세움)의 역사적 인물들을 상징하는 토우가 41점에 달한다.
토우들은 청대(清代)의 조각가들이 만들었으며 촉한(蜀汉)의 군신서열에 의하여 배치되어 있다. 이 밖에 탕뻬이[唐碑, 당비]는 사당 내의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이다.
이 비석에는 제갈량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있으며, 명대(明代)에 이르러 '삼절비(三绝碑)'라고 불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두 무후사 [成都 武侯祠(청도 무후사)] (두산백과)
무후사,한소열묘
무후사
무후사,한소열묘라고도 한다
무후사의 사자상
무후사의 사자상
무후사의 사자상
무후사의 사자상
무후사, 삼국성지
성도시 남쪽 교외에 있는 제갈량(諸葛亮)의 무후사로 향했다. 무후사는 서진(西晉) 말년에 이웅(李雄)이 세운 것으로, 원래는 성도 성안에 있었으나 뒤에 남쪽 교외의 유비(劉備) 사당인 소열묘(昭烈廟) 옆으로 옮겼다가 명나라 초에 소열묘와 합쳤다고 한다.
따라서 건물의 앞부분은 소열묘로, 뒷부분은 무후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옛날부터 그냥 무후사라고만 일컬어왔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제갈량이 유비보다도 더 민중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후사의 빛에 가린 혜릉 (중국문화답사기 3 : 파촉지역의 천부지국을 찾아서, 2007. 1. 29., 다락원)
유비
무후사
무후사
삼절비(자료사진)
무후사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큰 비석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절비(三絶碑)이다.
정식 명칭은 촉승상제갈무후사당비(蜀丞相諸葛武侯祠堂碑)이며 당나라 원화(元和) 4년(809)에 세운 것으로, 높이는 3.67m, 폭은 0.95m, 두께는 0.25m이다.
비문은 해서체로 세로 24행, 전문 1,094자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재상으로 있던 배도(裴度)가 글을 짓고,
유공권의 형인 명필 유공작(柳公綽)이 글씨를 썼으며, 이름난 석각장(石刻匠)인 노건(魯建)이 새겼으므로 속칭 '삼절비'라 불렀다고 한다.
또 하나의 설은 명나라 홍치(弘治) 10년(1497) 사천 순안사(巡按使) 화영(華榮)이 비에 발문을 붙이기를, "제갈공명은 배도의 비분으로 인해 더욱 잘 알려졌고,
비문은 유공작의 글씨로 인해 더욱 잘 알려졌으니, 제갈무후의 공덕은 배도의 문장, 유공작의 글씨와 더불어 불후의 명작으로 이 세상에 남을 것이다.
"라 하여 제갈량의 공덕과 배도의 글, 유공작의 글씨를 아울러 '삼절'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후사의 빛에 가린 혜릉 (중국문화답사기 3 : 파촉지역의 천부지국을 찾아서, 2007. 1. 29., 다락원)
무후사
제갈공명의 전출사표
송나라 충신 악비장군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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