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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tebet, tibet]

정혜거사 2018. 9. 21. 10:30


티베트[tebet, tibet음성듣기]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 곤륜산맥의 남측에 옆으로 누운 산악지대를 지리적으로 티베트(Tebet)이라고 한다. Tibet이라는 것은 이슬람을 거쳐서 유럽에 전해진 호칭으로, 현지어로는 푸(bod)라고 한다.


그 주 영역은 오늘날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서장자치구(티베트자치구)를 이루는데 동쪽은 대설산맥으로 중국 본토와 구분되고, 서쪽은 카라콜름산맥과 접하고 있다.


이 중 히말라야 산맥을 따른 남쪽과 그 북동으로 뻗친 연장 선상의 남북으로 달리는 계곡 청해 남의 사천성 서쪽의 토지에 사는 민족이 티베트인이다.


수의 시대에 그 존재가 한토에 전해지고, 당대에 <토번>이라고 불린 것은 이 티베트인이 세운 최초의 통일왕국이었다.

토번왕국

이 나라는 손첸 감포라고 하는 왕에 의해서 7세기 전반에 세워져, 수 • 당 2대의 압력에 의해서 멸망위기에 있었던 토곡휘를 병합하여, 7세기 후반부터 동서 통상로의 동단과 남쪽의 지배에 나섰다.


그 이전에 그들은 고유한 문자를 만들고 관위 12계를 정하였으며, 그 계층구조 중에서 여러 부족을 통합지배하는 법령을 정하고 왕의 군림을 받았다.


또한 군호, 민호를 구분해서 징병, 징발을 제도적으로 완비시킨 후에 당과의 싸움에 임하고, 안록산의 난 이후에는 우위에 서서 현대의 감숙성 동부를 제외한 대부분과 신강 위구르 자치구 남부를 9세기 전반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761년 이후 티손 데첸 왕(742~797)이 불교의 국교화를 추진하자, 지적 선량인승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나타나 곧바로 국정의 정점에 섰다. 그들은 싸움을 멈추고 822년 당과 화평조약을 체결, 이듬해 위구르와도 손을 잡았다.


이후 이 왕국은 오로지 불교국가의 이상을 따랐기 때문에 재정부담이 커져서 궁정세력의 분열로 843년 남북왕조로 갈라져서 붕괴했다.



남조는 선조가 있었던 츠앙보(장포)강 남안 야루른 지역으로 옮겼는데, 권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10세기 후반에는 그들의 먼 조상의 땅 라투나 가리로 도망가, 그곳에서 세력의 회복을 기다렸다.


11세기에 들어와서 서하의 서천으로 동서교통로의 동구가 막히자, 청해 주변에서 서역 남도로 나오는 새 길이 열려, 청해 남동의 촌카(서령) 부근이 대상의 기지로서 북적댔다.


그 땅에서 서하에 대항하는 군사력의 조직화가 요청 되었을 때, 티베트인에 대한 결속의 중핵으로서 라투로 도망갔던 토번왕의 후예 티데가 초청되었다.


그는 각 사라(보살이라는 의미)라고 하였는데, 결국 자신이 왕이 되어서 청당()왕국을 일으키고 나라에 불사를 세워서 왕년의 토번왕국을 소형으로 재현했다.

불교교단의 흥융

동일 무렵, 서방의 가리에서도 토번왕의 자손들이 세력을 회복해 인도에서 훌륭한 승을 초청, 젊은이를 유학시켜서 불교를 재흥했다.


중앙 티베트에서는 왕조 붕괴 이후 불교는 국가적 원조와 함께 제약도 받지 않게 되어서 비속화되었는데, 민간에 널리 만연한 민족종교인 본교나 금교가 된 탄트라 불교, 중국에서 온 선종 등이 일부 혼교하면서 민중사이에 기반을 두텁게 하였다.


바로 그때 여러 씨족의 세력에 균형이 잡혀서 안정이 찾아오자, 비속화된 불교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그 무렵 사무예사()를 지배하였던 북조의 후예가 후원해서 청당왕국에 젊은이를 파견해서,


그 지역에 가져온 토번왕국시대의 계율의 전통을 계승시키고, 중앙티베트에 불교교단을 부활시켰다. 교단은 각지에 재흥되어 승과 신자가 모여서 집락을 형성하고, 통상()이 성행하였다.



재능 있는 젊은이가 인도에 유학해서 유행하는 불교를 배우고 돌아오고, 인도에서 훌륭한 승려가 초청되었다. 이렇게 해서 몇 가지 종파가 발생했는데 유력한 씨족은 교단에 관계된 이권을 버리지 않고,


사캬파처럼 승이 되지 않은 중에 자식을 두어서 부모 자식이 교단을 상속하거나, 친척을 교단의 중추에 보내거나 중요한 지위를 삼촌 • 조카 간에 상속해서 교단을 사유화하고, 씨족단위로 계열화해서 씨족의 이름을 한 종파가 발생했다.


이 경향은 교단의 질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에, 전생활불()을 법주()로 하는 교단도 후년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교단의 지지층으로서 바람직한 씨족간에 유망한 유아를 구하고, 선대의 환생으로 지정해서 철저한 교육에 의해서 차대를 담당하는 자로 하였다. 따라서 교단은 씨족의 사유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질적으로도 향상되었기 때문에 종파적 결속을 배가시키는 공도 있었다.

원·명 왕조와 티베트

13세기 중반에 몽골군이 티베트에 침입했을 때 씨족교단은 몽골군과 몰래 접촉해서 재앙을 피했는데, 사자상속()의 대사원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티베트에는 통일권력은 없었지만 중앙티베트의 여러 씨족은 토번왕가의 후예를 중심으로 대책을 세워, 당시 최대의 씨족교단이었던 사캬파의 판디타라고 하는 장로를 파견해서 쿠덴왕이 명령에 응답했다.


그후 원조가 티베트를 지배하게 되자, 그 조카인 파스파(1235~80)가 후비라이의 신임을 얻어서 1270년에는 제사(제사)가 되었는데 그는 원의 티베트지배를 대행하면서, 이 나라의 교단사회를 위해서 많은 특권을 후비라이에 인정시켜 특이한 사회구조의 안정에 기여했다.


사캬파에서 계속해서 선출된 제사(제사)들은 원의 궁정을 탄트라 불교에 현혹시켜 막대한 포시를 인출해서 그 지배를 이름뿐인 것으로 하였다.



원조지배 말년, 티베트 국내에서는 중앙티베트 서부에 거점을 둔 사캬파 일족이 동부의 파크모두파 일족에게 군사적으로 압도되었으므로, 1354년, 원은 후자에 사도의 인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파크모두파 정권이 탄생하였고, 실력에 의해서 중앙티베트 여러 씨족의 세력균형을 추인하는 형태로 적극적인 회유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는데 파크모두파의 수령 외에, 사캬파 본가와 중앙티베트 북동부의 디군파 일족에 왕의 칭호를 주고,


한편, 종교계에서 카르마 카규파, 사캬파, 그에 당시 신흥의 게루파의 대표를 명도(명도)에 불러서 각각 법왕의 칭호를 주었는데 동방의캄 지방에서도 2명의 왕이 임명되었다.


이런 명의 방침을 감지하면, 각지의 씨족 교단, 특히 캄에서 사천 • 감숙 남부에 걸친 승도가 조정의 하사물을 목적으로 조공하고, 그 중에는 차의 밀 무역으로 이익을 얻는 자도 나타났다.


또한 궁정에 들어와서 총애를 얻기 위해서 탄트라 불교의 비외한 측면을 강조해서 성공하는 자도 나타나, 1세기 정도 명의 후궁을 혼란 시켰기 때문에 티베트불교에 주교음사로서의 천재의 오명을 주었다.

게루파와 카르마파의 항쟁

16세기 티베트 국내에서는 서부에 거점을 둔 린푼파족이 파크모두파 정권에 이반해서 실권을 장악하고, 17세기에는 같은 서부에 거점을 둔 그 가신 신샤파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 사이의 15세기 초에 촌카파에 의해서 게루파(황모, 도행파)가 개창되어 개혁적 기풍이 넘치자, 기성 종파의 권위가 희박해지고 카담파의 대부분이 전종()했으므로 신카담파라고도 하였다.


카담파 중에서 밀교적 수습을 중시해서 카규파라고도 불린 것에 전부터 전생활불제()에 의해서 법주를 세우고, 종파적 결속을 자랑했던 카르마 2파(흑모파, 홍모파)가 있었다.


그들은 일어나서 이 움직임에 저항했기 때문에, 게루파 중에서도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생겼다. 후자는 중앙티베트 동부를 본거지로 하였기 때문에, 파크모두파 일족이나 그 지배하에 있었던 이 지역의 여러 씨족과 결합했다.


이에 대해서 전2자는 파크모두파 일족과 대립해서 서부에 거점을 둔 린푼파족과 연대했다. 결국 서부세력이 군을 움직여서 동부에 압력을 가해, 촌카파가 창시해서 게루파가 계속 주최한 라사의 문람 대제에서 게루파를 배제하는 등의 실력행사에 이르렀다.


그때, 후년에 달라이 라마 2세가 되는 겐둔갸초(1475~1542)가 나타나서 게루파의 지원세력을 규합하여, 대항조치를 강구해서 1518년에 그들의 권익을 회복하고, 라사 근교의 데푼사의 주직이 되었다. 이런 투쟁이 끝나지 않은 중에 이 걸승이 사망했다.



따라서 게루파계의 지원세력에서도 종파의 결속을 위해서 데푼사 주직을 이 인물의 전생자()로서 보충해서 운동의 중핵으로 할 것을 고려했으며 이렇게 해서 카르마파의 거점에 가까운 유력씨족의 어린이로 그것을 지정했다.


게루파의 새로운 전생활불 소남 감포는 훌륭한 승으로서 성장했는데, 주위의 기대에 반해서 대립하는 2파의 세력을 융화시키는 노력을 계속했다. 1578년, 그는 청해()의 남안에 가서, 그를 부른 알탄 칼과 만나고, 칸을 교화해서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받았다.


그후 캄 지방의 교화로 다시 몽고리아로 향하고, 할라하 부족도 교화했으며 그 땅에서 사망했다. 게루파의 종파 지도층은 카르마파와의 융화책을 버리고 대결책을 취해서 알탄 한의 조카의 아들을 달라이 라마의 전생자로 지정했는데 그 일족 투메투부의 군사력을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 노골적인 태도가 원인이 되어 카르마파와의 대립이 재연되자, 후자는 안으로는 새로운 지배자 신샤크족과 결합하고, 게루파를 모방해서 밖으로는 차하르이나 할라하의 몽골인을 교화해서 연대했다.


17세기에 들어와 몽골인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고, 결국 그 일족이 차하르이나 청해의 할라하에 멸망하자, 게루파는 위기에 처했고 급거 오이라트에 사자를 보내서 구시 칸과 동맹을 맺고, 그 군을 도입해서 카르마파를 지지하는 청해의 몽고인을 토벌했다.


또한 중앙티베트 서부에 거점을 둔 신샤파 정권도 멸망시켜서 1642년 구시 칸의 군사력을 뒷배경으로 달라이 라마 5세를 법왕으로 하는 정권을 수립했다.


45년부터 포탈라궁을 조영해서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상징시키고, 몽고인 일반에 대한 지배를 점차로 강화하고 널리 속권의 수수로까지 권위로서 관계하였다. 그렇게 해서 구시 칸의 사망 후에는 그 자손을 임면하는 형태를 취할 수 있었다.

청조의 티베트지배

달라이 라마 5세의 말년부터 18세기 초까지 섭정 산게 갸초(1653~1705)가 실권을 잡고, 오이라트의 가르단을 조종해서 전 몽고인에 대한 지배를 그의 군사력으로 강고히 했기 때문에, 몽골의 인심을 오히려 잃는 결과가 되었다.


18세기 초, 구시 칸의 증손 라산 칸(?~1717)이 복권에 뜻을 두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섭정을 죽이고, 청조와 결합해서 갈라이 라마 6세를 세웠기 때문에 청해의 몽고인이나 막북 쥰갈인의 반발을 초래하고, 후자는 몰래 군을 파견해서 17년에 라산 칸을 멸망시켰다.


청조는 청해의 몽고인이 달라이 라마 6세의 전생자로서 옹립한 유동을 미리 청해에 보호하였는데, 이를 정식으로 7세로 인정하고 군대와 함께 라사로 보내 쥰갈군을 내쫓아 20년에 칸첸네 등에 정권을 담당시켰는데, 신()달라이 라마는 상징적 존재에 그쳤다.


27년 칸첸네가 청의 명령을 받아서 고파 불교도를 탄압해서 살해되자, 폴라네(1689~1747)는 청에 통보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주모자들을 체포하고 청병의 도착을 기다려서 단죄했다. 이렇게 28년, 청의 주장대신 감시하에 폴라네의 독재정권이 출발했다.


달라이 라마의 아버지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청은 달라이 라마를 사천의 갈타르에 보내서 근신시키고, 35년까지 라사로의 귀환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달라이 라마 특권의 일부를 빼앗아서 판첸 라마에게 부여하여 후자의 세력을 청조 측에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달라이 라마에 의한 지배

폴라네는 청조의 신임을 얻어서 40년 군왕으로 임명되고, 1747년에 사망했다. 뒤를 이은 차남 길메 남겔(?~1750)은 아버지와 일변한 태도를 취해서 청군의 철퇴를 구하는 한편, 티베트의 군대를 준비했기 때문에 50년 2명의 주장()대신에게 살해되었다.


격분한 길메 남겔의 무리에게 주장대신들이 살해되자, 달라이 라마는 이변에 놀라면서도 민중을 달래서 청조측의 가족을 포탈라궁에 보호해서 청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청은 달라이 라마의 처치를 높이 평가해서 51년부터 달라이 라마를 주권자로 하고, 주장대신과의 좁은 의미를 조건으로 4대신 합의의 행정조직을 출발시켰다.


이것이 최근까지 계속된 달라이 라마 정체의 출발이었다. 얼마후에 달라이 라마 7세는 사망하고, 달라이 라마 8세가 오르자 성년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달라이 라마의 명대직()이 설정되었다.


최초의 명대직이 사망했을 때 달라이 라마 8세는 20세이 이르렀으나 정치에 관심이 희박해서 계속 섭정을 두었기 때문에 권력투쟁에 새로운 길을 열게 되었다.


8세 사망 후 달라이 라마 13세가 등장하기까지, 그 사이의 달라이 라마는 20세 전후 또는 그 이전에 세상을 떠나, 실권은 섭정이나 명대직 사이에서 수수되었다.


그 사이에 네팔을 지배한 글루카가 티베트를 침략하였고(1788~1791, 92), 1841년에는 도쿠라 전쟁이 일어나서 티베트가 조라와르 싱에 공격 당했다.


이때 티베트군은 반격했지만 이듬해 라다크에서 패해는데 당시 청은 아편전쟁으로 인해서 원군을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감독력이 무시되고, 티베트 국내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권력쟁탈이 반복되었다.


즉, 명대직 라덴활불()과 쉐다와 완츄크 게포(?~1864)가 권력을 다투고, 후자에 협력해서 치캡 켐포(내각지도승)까지 된 펜덴 툰두프는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자 달라이 라마 12세를 폐하고, 섭정 켐라프 완츄크에 쫓겨났다. 이런 모략이 몇 년간 휘몰아친 후에 달라이 라마13세가 등장했다.



달라이 라마 13세가 태어난 1876년, 티베트가 알지 못하는 중에 청과 영국의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고, 이후 영국은 티베트에 대한 입국권을 주장했다. 달라이 라마 13세가 실권을 손에 쥔 95년은 청이 일본과의 싸움에 패한 후였기 때문에, 티베트는 청의 종주권을 부정해서 영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 무렵부터 제정 러시아가 티베트에 왕래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초조해진 영국은 1904년 영어즈밴드에 의한 무장사절단을 라사에 파견했다. 달라이 라마는 외몽고의 우르가로 망명하고, 사절단은 부재를 지키는 간디사() 좌수와 티베트 • 인도조약을 체결하고 돌아갔다.


청은 티베트 • 인도조약에 조인하지 않았지만, 종주권 확인을 위해서 라사정부의 대표를 인도로 호출하여 그손에 배상금을 건네 영국에 지불시켰다.


달라이 라마는 거듭되는 귀환요청에도 응답하지 않고, 청해에서 북경을 향하여 08년 그곳에 당도했으며 청은 그 사이에 종주권 확인의 외교공작을 완성하고, 10년 초청해서 귀국한 달라이 라마를 쫓아내기 위해서 군대를 라사로 보냈다.


달라이 라마 13세는 여장을 풀 여유도 없이 이번에는 인도로 망명했다. 청은 달라이 라마를 파면하고 캄 지방에 서강성을 세워서 직할지로 하였다. 청에 점령된 라사에서는 판첸 라마 6세가 맞이되어서 청에 협력했다.


이듬해 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 멸망하여 13년 1월 달라이 라마가 귀국했는데, 원세개의 요청을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14년 영국은 시무라 회의를 열어 중국의 종주권 하에서 대폭적인 티베트의 자치를 요구했으나 중국은 이에 조인하지 않았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동부 티베트에서 중국세력을 추출해서 실효지배에 지향해서 거의 성공했다. 그 사이에 재정 부담을 판첸 라마에도 구했는데, 청에 협력한 판첸 라마는 보복을 두려워해서 몰래 티베트를 탈출하여 25년 북경에 이르렀다.


이후 판첸 라마의 귀국과 티베트의 중국으로의 귀속이 국민당에서 거듭 요청되었으나, 달라이 라마 13세는 거부를 계속해서 33년 사망하고, 판첸 라마도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


후자의 전생자는 라사정부와는 별도로 국민당에서도 선출되어 공산당에 계승되었는데, 51년 티베트로 들어갔기 때문에 정식으로 신분이 정해졌다. 같은 청해 출신인 달라이 라마 14세는 59년 중국 공산당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인도로 망명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티베트 [tebet, tibet]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