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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공주를 잡아라

정혜거사 2020. 5. 19. 15:30

"티베트의 공주를 잡아라"

 

허물어진 히말라야의 장경각 티베트

 

한국동란이 일어나던1950년 – 티베트는 중공 혁명에 성공한 모택동의 침공을 받아 중국인민해방군에 점령되고 수많은 불교사찰이나 불상이 파괴되고 1965년 나라가 통째로 없어졌다. 중국의 자치구로 편입된 것이다. 히말라야 천연성벽에 쌓여 오랫동안 보관되던 순정(純正) 불교의 보고(寶庫)의 뚝이 공산주의 물결에 허물어져버린 것이다.

 

이 귀중한 창고 지킴이 역할을 맡아왔던 양두(兩頭) 체제중 첫째인 승왕(僧王) 14대 달라이라마가 47년전인 1959년 인도로 탈출했고, 그곳에 남아있던 10대 판첸라마는 영화에서 보던 청(淸)의 ‘마지막 황제’처럼 온갖 수모를 겪은 뒤 지난 1989년 티베트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을 꿈꾸며 티베트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그리워하고 숭상하는 티베트인들에게 큰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통하는 한 여대생이 있다. 바로 ‘티베트의 공주’라고 불리는 판첸라마의 딸, 렌지양이다.

 

 

 

판첸라마의 딸, 렌지

 

16세의 중국제 판첸라마 환생자가 타시룬포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하며, 그와 티베트에서의 종교자유 논쟁을 벌이던 망명 달라이라마가. 중국의 압력에 지친 듯, 지난 2005년 봄 돌연 티베트 독립 포기 선언을 해 세계불자들의 충격으로 전해왔다. “티베트는 중국 땅, 티베트불교는 중국불교”라며, 단지 티베트의 자치권만 보장해 달라는 달라이라마의 굴복을 티베트 망명정부측은 ‘중도주의적 접근법’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런 배경과 상황에서 티베트인들 뿐 아니라, 중국인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 불자들 사이에도 점차 관심을 높이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판첸라마의 딸, 렌지양이다. 그녀를 아는 것은 곧 티베트의 역사를 아는 것이며, 오늘의 티베트를 읽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티베트의 공주’("Princess of Tibet")라고 티베트어, 중국어 그리고 영어로 인쇄된 핑크색 명함을 가진 방년 23세의 티베트 미녀, 렌지의 이름은 길다. ‘얍시 판 린진왕모.’

이탈리아의 고급 프라다패션 의상을 즐겨입고, 유럽의 테크노 댄스를 좋아하며 자동차 레이스에 열정을 품고있는 렌지는 지난 1989년 사망한 10대 판첸라마가 이 세상에 남겨둔 단 한 명의 혈육이다.

 

티베트 전통의상 추바를 즐겨입고, 한때 할리우드의 액션배우 스티븐 시걸의 후견을 받으며 LA에서 중고교를 거쳐 워싱턴의 아메리카대학에 진학한 미국유학생이던 그녀는 얼마전 중국의 최고통치자 후진타오의 호출을 받고 칭후아(淸華) 대학으로 전학한 대학생이 돼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춘기 성장기 10년 가까운 세월을 미국에서 보낸 그녀에게는 ‘LA터치’가 물씬 풍기고 있다는 게 얼마 전 베이징에서 그녀를 만난 서방 취재진의 보도다.

 

판첸라마 달라이라마의 유래

 

렌지의 아버지는 티베트의 4대 불교부파 중의 하나인 겔룩파가 티베트의 지배 그룹으로 등장한 지난 17세기에 강력한 파워를 얻게된 판첸라마의 열 번째 환생자였다. 인도에서 망명 티베트 정부를 이끌고 있는 최고의 통치자 달라이라마에 이어 티베트의 전통적 하이라키에서 두번째로 높은 지위가 판첸라마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는 서로의 환생자를 발견해 인정할 책임이 부여된 겔룩파 불교 왕권의 양대 기둥으로 통해왔다.

 

렌지는 롭상 최키 걀첸 이후 여섯번째(통산 10대)가 되는 판첸라마 환생자의 친딸, 렌지는 기묘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엄격한 계율을 생명으로 알던 겔룩파의 출가비구승 판첸라마와 세간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역대 판첸라마 환생자들 가운데에 그녀의 아버지는 최초의 이변(異變)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6대 달라이라마도 미혼 비구로서 밤이면 포탈라궁전을 빠져나가 금지된 사랑을 나누던 해프닝을 일으켰지만, 스캔들이 번지며,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었다.

 

중국 미녀와 티베트의 출가 법사

 

그러나 10대 판첸라마는 40세의 나이인 1979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당시 새파랗게 젊은 21세 미모의 신부는, 자유중국의 국부 장개석 총통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모택동에게 변절해간 중공 인민해방군의 장군(董基武)의 손녀(董李傑)였다. 결혼식장도 티베트가 아니라 가택 연금생활을 하다 풀려난 중공의 베이징(북경). 말하자면 서로 적국에서 적국 남녀들 간의 결혼에서 1983년에 태어난 결과가 바로 렌지였다.

 

모택동 침공시에 티베트를 탈출한 달라이라마와 달리, 티베트에 남아있던 그는 중국의 허수아비라는 비난을 들었지만, 얼마 뒤 청(淸)의 마지막 황제와 유사한 체포와 연금생활, 자기비판을 강요 당하는 수모 그리고 베이징에 끌려와 시달리는 등 파란만장한 시련을 겪은 터였다.

 

중국에 의한 티베트 불교사찰 파괴, 티베트인 승려들의 살해와 박해 사건에 대해 1962년 판첸라마가 발표한 ‘10만 언서 (言書)’라는 이름의 항의서가 문제의 발단이 됐다. 모택동은 이를 반동분자의 독화살이라고 평했다. 1968년에 투옥된 그는 1977년에 석방됐고, 결혼은 석방후 1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1983년까지는 가택연금상태에 있었다.

 

모택동의 사망과 등소평의 등장 이후 복권된 그는 중국인민의회의 부위원장으로까지 다시 승격됐지만, 1987년 미국 하원 연설에서 달라이라마가 티베트 독립을 위한 평화적 해결 방안을 발표하며, 이에 동조하는 티베트승려와 시민들의 시위가 라사에서 촉발돼, 많은 사람들이 체포 투옥됐다. 비밀리에 이들 승려들의 구명운동을 벌이던 판첸라마는 1989년 51세를 일기로 원인 모를 이유로 사망했다.

 

렌지의 눈길을 끌게 된 계기는 그의 아버지 판첸라마 사후 6년 뒤, 달라이라마와 중국 당국이 1995년 각각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두명의 판첸라마 환생자가 발견돼면서 부터.

 

달라이라마와 그 일행들이 발견했다는 6살짜리 환생자(11대 판첸라마)는 게둔 최키 니마이며, 이에 이어 중국 당국은 걀첸 노르부가 진짜 환생자(11대 판첸라마)라고 맞섰다. 게둔 최키 니마는 달라이라마가 환생자로 밝힌지 며칠 안돼 중국당국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소문과 함께, 행방이 감추어졌고, 그의 구명운동이 UN과 서방 불교도들 사이 에서 오늘날까지 벌어지고 있다.

 

미국유학이라는 명목으로 그녀의 홀어머니가 렌지를 서둘러 외가 친척이 살던 뉴욕으로 보낸 것도 두 명의 환생자 발견소동 이후, 달라이라마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타시룬포의 승려들이 중국당국으로부터 숙청되는 복잡한 상황이 벌어지던 당시였다. 뉴욕의 렌지는 다시 스티븐 시걸이 보낸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이송됐다.

 

스티븐 시걸의 후견

 

렌지의 미국행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히말라야의 정치 때문에 이뤄진 것이라고 스티븐 시걸은 말했던 거로 전해진다. 불교에 심취해 티베트 닝마파 수행자의 환생자로 인정된 할리우드 스타 스티븐 시걸은 그녀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고, 중국 신흥재벌들의 자녀들인 유학생들이 붐비는 LA남부 산 마리노의 한 고교에 입학했다.

 

히말라야의 아버지의 나라 티베트의 타시룬포 사원 또는 어머니의 나라 베이징에서 사춘기를 보낼 판첸라마의 딸은 어머니를 중국에 남겨둔채 LA근교에서 고교생활을 하며 홀로 자유의 나라 미국 청소년 소녀들의 자유분방한 삶을 맛보게 됐다. 프라다나 구찌등의 패션과 모터사이클, 자동차 그리고 주말 파티와 댄스뮤직, 카페 그리고 혼자 보는 수퍼마킷 야채 쇼핑과도 익숙하게 된 것은 물론이다.

 

캘리포니아의 햇볕을 떠나 워싱턴의 대학에 진학했지만 그곳은 너무 싫증나는 곳이어서 가끔 뉴욕을 방문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는 그녀의 고백이었다. 그러나 렌지에게 눈을 떼지 않고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걀첸 노르부를 11대 판첸라마로 인정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는 중국 당국. 그리고 게둔 최키 니마의 행방을 찾고있는 달라이라마의 망명정부 관리들과 티베트 안팎의 티베트인들이 그들이다.

 

현 14대 달라이라마의 유고시에 닥쳐올 15대 달라이라마 환생자를 발견하고 인정할 진짜 11대 판첸라마의 역할이 막중하다. 게둔 최키 니마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두명의 11대 판첸라마중 진짜를 가릴 마지막 대결에서 믿을만한 캐스팅보트는 바로 10대 판첸라마의 딸, 렌지에게 쥐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렌지는 아버지의 환생자들을 모두 만나볼 기회는 없었고, 단지 중국 당국이 주장하는 11대 판첸라마 환생자와의 첫 대면은 베이징에서 열린 10대 판첸라마 사망 10주기 행사장에서 있었다. .

 

그녀는 지난 2002년 아버지가 모셔져있는 금탑 옆에서 티베트어와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잠시 타시룬포를 방문한적이 있다. 그곳에서 11대 판첸라마 걀첸 노르부와 두번째로 만났다.

어버지 환생자에게 절하라는 주위의 권고에 대해 렌지는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는 살아계신 동안 나에게 오체투지를 요구한 분이 아니었다. 난 누구보다 자라며 보아온 우리아버지에 대해 잘 안다. 나에게 오체투지를 바란다면 우리 아버지답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열광하는 티베트인들과 렌지의 미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티베트인들이 이들 판첸라마 환생자보다 판첸라마의 친딸에 대해 더 많이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렌지는 이곳 방문 기간에도 전에 아버지의 고향 칭하이(암도)를 방문했을 때처럼 무려 1만명의 친견(親見)을 바라는 티베트인들의 장사진에 놀랐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책임감을 깊이 느낀 것 같다.

 

중국 최고 실권자 후진타오가 렌지를 급히 베이징으로 돌아오도록 칭후아대학을 추천한 것도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산호염주와 반지를 팔목에 끼고, 베르사체 가죽시계를 차고 아버지의 사진이 백 미러에 걸린 베지색 벤츠차를 모는 베이징의 렌지-. 그녀는 가족들의 사업체와 중국 남부에 열곳에 문을 연 티베트 약국 체인을 경영하며 대학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18세때 이미 티베트 적십자 명예부총재가 된 그녀는 백일 때 당시 판첸라마의 후견인 노릇을 한 주은래 중국수상의 부인이 그녀에게 단결을 뜻하는 ‘단단(團團)’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기억한다. 많은 티베트인 그리고 중국측은 그녀의 역할에 대해 나름대로의 기대를 걸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녀는 티베트의 동등권과 자유를 말하면서도, 여간해서 속내는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렌지의 존재는 앞으로 어떻게 발전 변모돼 갈지? 자못 궁금한 노릇이다. 달라이라마를 분리주의자로 비난하는 중국 당국은 티베트에서 그의 사진부착을 금지시켜왔다. 그렇다고 해서 티베트인이 타시룬포의 새 주인이된 젊은 중국제 판첸라마에게 열광하는 것도 아니다. 티베트인들의 상점을 장식하고있는 사진은 여전히 렌지의 아버지 10대 판첸라마 뿐이다.

 

금년 70세의 달라이라마 이후를 생각하는 티베트인들과 중국 당국의 시선은 판첸라마에게 몰릴 것이며, 판첸라마의 친딸의 역할도 눈덩이처럼 커질 수도 있다.

 

그녀가 과연 티베트의 정복을 중국측이 바라는 대로 어머니의 나라 중국과 아버지의 나라 티베트의 단합이라는 사탕발림의 상징을 구현시킬 것인지? 아니면 판첸라마나 달라이라마도 포기한 티베트의 독립을 향한 초석, 티베트인들의 단결을 마련하는 데에 기여하게 될지?

 

출처: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