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운남 차마고도 여행

샹그리라(18.4.28)

정혜거사 2018. 5. 5. 12:43

 

4.28토 맑음

 

0545기상 0700 식사 0800출발

아침은 흰죽 빵 꿀 사과 김치 반찬

차마 중도객잔은 2300m

0810 찝차 출발, 0835 버스로 갈아타고 샹그리라로 출발

송찬림사 3500m 1140 송찬림사 도착

 

그전에 장족민가방문하여 수유차와 간식 먹고 걸어서 송찬림사로

1140-1225 절구경, 버스타고(1위안)  주차장의 우리버스로

1235 식사하러 출발 한식당에서 삼겹살 된장,김치찌개 먹고

샹그리라고성 구경 대형마니차 사진 찍고 공항으로 이동

공항에서 짐정리

 

1530 탑승 맨뒷자리 1550분 이륙 1635착륙 1640도착

1725 버스탑승 짐찾는 곳 멀어 한참걸림 가이드 윤문광

저녁 동북요리 먹고 발마사지 받고 호텔로

발마사지 팁15위엔/준비

 

동북요리는 탕수육(꿔바로우), 새콤 달콤함

식사후 잔돈바꾸기 위해 식당을 나와 가게를 찾기위해

상점에 들어가서 챠오시 짜이날 하자 친절하게 나와서 골목을 알려줌

물 두병 사고 잔돈 바꿈

 

장수공항2200m 곤명시내 1892m 남쪽 시상반나64m 보이차지역,

샹그리라 3300-3400m 평균 메리설산이 제일 높음

운남성은 23개성중 6번째 5000만명 다랭이논  여강고성 등

퇴근시간에 걸려 차가 많이 막힘(서울보다 더 막힘)

 

1830부터 비가옴 차는 막히고ᆢ마사지는 1940-2035

2040 호텔로 마사지는 부부방에서ᆢ 팁15×2=30

내일은 0800 석림으로 오후부터 속이 않좋아 정로환 먹음

 

 

 

 

 

버스에서 짚차로(흰색 두대) 갈아탄 식당겸 객잔

4.26일 점심을 여기서 먹었다

오늘 중도객잔에서 내려와 버스로 갈아 탔다

 

 

샹그릴라[香格里拉] | Shangri-la

동티베트 캄에 속하는 샹그릴라는 티베트 문화권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으로 꼽힌다. 운남성과 티베트를 잇는 차마고도에서 샹그릴라는 보석 같은 존재였다.

 

메리설산과 진사강 등을 건너 티베트로 진입하는 마방 상인들의 고된 여정에서, 샹그릴라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쉼터였다.

 

해발 3,200m의 푸른 협곡에 펼쳐져 있는 마을의 본래 이름은 중전(中甸)이었다. ‘샹그릴라(Shangri-La) 1933년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쓴 소설<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평생 늙지 않고 영원한 젊음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다.

 

샹그릴라는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티베트 마을을 모델로 삼았다고 하는데, 1997년 중국 정부는 중전이 바로 소설의 배경인 샹그릴라라고 발표하고, 2001년에는 아예 샹그릴라로 개명했다.

 

샹그릴라는 티베트어로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다.

샹그리라 가는길의 휴게소

 

 

샹그리라 가는길의 휴게소

화장실 사용료가 1원이다.

 

 

 

 

티베트 불탑인 초르텐(스투파), 샹그리라 시내

 

 

▣ 유토피아 샹그릴라(香格里拉, 해발 3,459m)
운남성(雲南省) 디칭티베트족자치주(迪慶藏族自治州)의 현(縣)으로 쿤룬산맥(崑崙山脈) 서쪽 끝에 있으며, 원래 지명은 중뎬(中甸)이었으나, 2001년 샹그릴라로 개명했습니다.
 
샹그릴라는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의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년)'에 나오는 지명으로,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평화롭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로 묘사되었으며, 티베트어(語)로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입니다.
 
1997년 중국 정부에서 중전이 샹그릴라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티베트족ㆍ회족ㆍ묘족 등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으며, 그중 티베트족이 43%입니다.
 
평균 해발 3,459m의 고산지대로 산악지형이 전체 면적의 93%이며, 여름 평균 기온은 15℃입니다. 설산, 계곡, 호수, 울창한 숲 등이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답고, 동식물 등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 티베트의 역사
 
 
 
7세기 최초로 티베트를 통일한 후 토번(吐蕃)을 건국한 송첸칸포가 네팔 브리쿠티 데비, 당나라 문성공주와 정략 결혼을 하면서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티베트인들의 삶과 밀접한 종교, 티베트 라마불교는 주술을 중시하는 토속 신앙인 본교를 배척하지 않고 혼합된 형태로 토착화하였습니다.
 
8세기 인도의 샨티 락시타와 파드마삼바바가 밀교를 전한 후 티베트 불교의 근본은 밀교가 되었습니다.

9세기 라마불교가 종교 이상으로 세력화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랑다르마 왕은 경전을 불태우고 승려를 감금하는 등 라마교를 탄압하였고, 결국 승려계층에 의해 랑다르마 왕이 암살되면서 티베트는 분열되었고 오랜 암흑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후 일정한 세력을 가진 라마교 종파들이 사찰을 중심으로 작은 국가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각 종파들은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전투구를 거듭했습니다.

12세기 몽골에 의해 점령당했으나 문화적으로 몽골에 앞선 티베트는 13세기 라마불교를 몽골에 전파하면서 라마불교는 원나라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14세기 말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자 파크모두 왕조가 일어나 티베트 통치를 자임했으나 통일왕조를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15세기 라마불교 최대 종파인 거루파의 창시자 총카파(宗喀巴, 1357~1419년)는 반야중관(般若中觀) 사상을 기초로 타락한 밀교를 개혁하여 화려한 종교문화를 꽃피웠으나 티베트의 군사력이 약해지면서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총카파의 제자 중 젠둔 드럽(1391∼1475년)은 초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고, 몽골은 거루파 지도자를 '위대한 스승'을 의미하는 달라이 라마라고 호칭했고, 달라이 라마 제도는 오늘날까지 티베트 사회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17세기 거루파는 외세인 몽골을 끌어들여 닝마파를 축출하면서 달라이 라마 정권이 티베트를 재통일하였으나, 18세기 만주족이 청나라를 건국한 후 강희제에 의해 보호령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달라이 라마를 국사로 임명하고, 달라이 라마는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티베트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긴밀한 협력관계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200여 년간 이어졌습니다.

이후 티베트는 독립을 선언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약했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1951년 모택동은 무력을 동원해 티베트를 점령했습니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 14세를 회유하기도 했지만 1959년 티베트 공산화에 반대하는 봉기가 발생하면서 120만 명에 달하는 티베트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는 인도 맥그로드 간즈로 망명해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웠고, 1960년대 문화대혁명으로 티베트의 종교유산은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승려들은 강제적으로 환속되었습니다.
 
중국은 티베트의 자치를 허용하고 있지만 달라이 라마는 보다 높은 수준의 자치를 요구하며 중국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인들은 자신의 국가를 관음의 정토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달라이 라마 14세를 관음의 화신으로 믿고 있습니다.
 
 

샹그리라 시내

 

 

샹그리라 시내

 

 

장족 문화 전시관

 

 

 

 

장족 문화 전시관

 

 

장족 문화 전시관

 

 

 

 

장족 가정집 건축현장

집의 규모가 엄청나다

 

 

 

 

 

 

 

 

 

 

장족 가정집

 

 

 

 

 

 

중국인민은행 건물

 

 

도길니미 호텔(두지니미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