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일정확정][특수지역][고대 인류 최고의 교역로, 실크로드의 핵심] 하서주랑 & 서안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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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일 2017년07월 22일 (토)
교통편
[고대 인류 최고의 교역로, 실크로드의 핵심] 하서주랑 & 서안 6일 |
상품코드 : CQP811170722MU |
상품 핵심 포인트
식사
- 덕발장 교자연(德發長 餃子宴) 특식 : 강택민 전 주석과 김대중ㆍ클린턴 전 대통령 등 명사들이 방문한 유명한 만두요리 전문점
- 호텔식 UP GRADE
관광
- 고대 실크로드의 핵심 하서주랑(河西走廊) : 하서사군(河西四郡) 무위(武威)ㆍ장액(張掖)ㆍ주천(酒泉)ㆍ돈황(敦煌)
- 단하지모(丹霞地貌) 계곡에 펼쳐진 화려한 대지의 예술작품 칠채산(七彩山)
- 만리장성의 서쪽 끝ㆍ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가욕관
- 실크로드 최고의 오아시스 돈황(敦煌) : 불교 예술의 정수 막고굴(莫高窟), 명사산(鳴沙山) & 월아천(月牙泉)
- 낙타를 타고 명사산에 올라 카라반(Caravan-1시간 소요) 체험
- 감숙성(甘肅省) 성도(省都) 난주(蘭州) : 감숙성박물관(甘肅省博物館)
- 실크로드의 시발점 서안(西安) : 3,000년 역사의 고도(古都)
호텔
- 고품격 준5성~5성급 호텔 이용
교통
- 동방항공 이용 : 인천/상해-서안/인천
※ 본 여행상품은 실시간 항공권 예약(예약 후 48시간 이내 발권)으로 진행되며, 확보되는 클라스의 항공운임에 따라 여행경비는 변동됩니다.
※ 항공사의 좌석 상태에 따라 1일차 인천/남경 또는 서안 경유/난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중국 국내선 : 상해/난주/서안
- 고속열차 : 돈황/난주
- 동방항공 이용 : 인천/상해-서안/인천
보험
- 여행자보험 최대 보장범위 1억원 → 2억원 업그레이드 : 보장내역 자세히보기
- 타사대비 최대 보장한도! [상해] 300만원 → 2,000만원 / [질병] 100만원 → 1,000만원 보상
- [휴대품 분실] 50만원 → 최대 70만원 보상!
기타
- 20명 이상 출발시 실크로드 여행 전문가 동행 : 실크로드의 역사ㆍ문화ㆍ소수민족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
▣ 동행인 이철희 대표 소개 : ※ 동행인의 사정에 따라 다른 실크로드 여행 전문가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한국 최초로 1999년 실크로드의 시발점 서안(西安) 전세기, 2006년 티베트 여행의 관문 성도(成都) 전세기, 2013~2014년 실크로드 하서주랑(河西走廊)의 관문 난주(蘭州) 전세기를 취항시켜 티베트 및 실크로드 여행상품을 개척했습니다. 또한 1989년부터 500여 차례 중국을 여행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2011~2016년 한겨레신문에서 주관한 『티베트 문화답사』 및 『유라시아 문명길, 실크로드 문화답사』 프로그램을 기획ㆍ운영하면서 본 행사에 동행했습니다. - 4~9명 출발시 여행경비 \300,000 인상 행사가능
- 15명 이상 출발시 가이드/기사 팁 포함 : 4~6명 출발시 $150, 7~9명 출발시 $85, 10~14명 출발시 $60 현지지불 조건
- 중국단체비자 포함
- 20명 이상 출발시 실크로드 여행 전문가 동행 : 실크로드의 역사ㆍ문화ㆍ소수민족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
포함 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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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포함 내역 |
※ 매너팁은 소비자의 자율적 선택으로 지불여부에 |
선택경비 |
※선택관광/기항지관광/현지투어에 관한 상세 내역은 |
예약시 유의사항
- - 트리플룸 예약시 중국은 3인실방이 없는 관계로 2인실방에 간이침대가 추가로 제공됩니다.
- 항공 발권 후에는 표준약관과 상관없이 취소 수수료가 발생하오니 신중하게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 당일캔슬 환불안되는 티켓이니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중국단체비자 유의사항]
·중국은 출입국시 단체비자 또는 개인비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외국/이중국적자께서는 본인의 국적지 대사관으로 문의하셔야 합니다)
·단체비자는 동일 일정의 다른 고객님과 함께 별도의 용지에 영문명, 성별, 여권번호, 생년월일이 포함되어 인쇄/발급되어 집니다.
·단체비자의 경우 여권사본이 제출되어야 발급 가능합니다.(출발 10일 전까지 여권사본 예약대리점에 반드시 전달)
·출국 당일에는 단체비자 원본이 미팅 시 대표자 한분에게 전달 되며, 기존 전달한 여권정보와 불일치 시 출국이 불가능하며 이에 따른 비용은 고객 본인이 부담하셔야 합니다.
[중국 단체비자 발급시 안내사항]
당사는 여행객의 편의증진을 위하여 중국비자 사증발급 업무를 지원합니다.
단체비자 접수를 원하는 고객님은 출발일 10일 전까지 예약한 여행사로 여권 사본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단체비자 발급절차 과정을 원하시지 않을 경우 개별적으로 중국주한대사관 영사부를 통해 개인비자를 진행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사의 귀책사유가 아닌 신청인의 개인적 사유로 비자발급이 거절되는 경우에 여행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가이드 정보
가이드현지 도착시 가이드와 미팅이 이루어집니다
인솔자 정보
인솔자
인솔자 동행여부는 미정입니다.
여행정보
여행일정
미팅일시/장소 | [미팅 일자 07월 22일] [미팅시간 오전 10:25] 인국제공항 3층 출국장 G21~G36 카운터 '하나투어' 피켓 앞 미팅 (※ 10명 미만시 개별 탑승수속) 약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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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2017-07-22 (토)
2017-07-22(토)12:55인천ICN 출발
비행 01시간 50분 MU5042
2017-07-22(토)13:45상해PVG 도착
대기02시간 20분
2017-07-22(토)16:05상해PVG 출발
비행 05시간 40분 MU2354
2017-07-22(토)19:25난주LHW 도착
프로그램 기획취지
고대 인류 최고의 교역로 실크로드의 핵심 하서주랑과 천산북로의 문화탐방과 중국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新실크로드 정책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를 이해함으로서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기획한 인문ㆍ교양 프로그램입니다.
인천☞ [미팅시간 오전 10:25]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 G21~G36 카운터 '하나투어' 피켓 앞 미팅 (※ 10명 미만시 개별 탑승수속)
인천-상해로 이동 (약1시간50분 소요)
[MU5042 12:55 인천 출발-13:45 상해(上海) 도착]
[MU5042 12:55 인천 출발-13:45 상해(上海) 도착]
중식 (기내식)
상해
상해-난주로 이동 (약3시간20분 소요)
[MU2354 16:05 상해 출발-19:25 난주(蘭州) 도착]
[MU2354 16:05 상해 출발-19:25 난주(蘭州) 도착]
난주
▣ 실크로드의 역사
실크로드는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1905년)이 중국을 다녀온 후 1877년 '중국'이라는 책에서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젠(Seidenstrassen)'이라고 명명하면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사주지로(絲綢之路)'라고 불립니다.
BC 4세기 전국시대부터 한(漢)나라 초까지 실크로드는 타림분지 주변의 '서역(西域) 36국'이라고 불리는 작은 오아시스 국가들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실크로드를 통한 경제적 이익이 커지면서 2세기부터 중국의 왕조들과 흉노ㆍ돌궐ㆍ토번(吐蕃, 현재 티베트) 등의 유목민족들이 실크로드를 차지하여 교역으로 인한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서역 36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군사적 움직임이 발생했습니다.
BC 139년경 한무제(漢武帝)는 대월지(大月氏, 아프가니스탄)와 동맹을 맺어 당시 타림분지를 점령하고 있던 흉노를 치기 위해 장건(張騫, ?~BC 114년)을 대월지에 파견했으나 결국 동맹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BC 139년경 한무제(漢武帝)는 대월지(大月氏, 아프가니스탄)와 동맹을 맺어 당시 타림분지를 점령하고 있던 흉노를 치기 위해 장건(張騫, ?~BC 114년)을 대월지에 파견했으나 결국 동맹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장건은 BC 126년 귀국할 때까지 중앙아시아의 대원(大宛, 페르가나)ㆍ강거(康居, 키르기스탄)ㆍ대월지ㆍ소월지(小月氏, 카자흐스탄)ㆍ대하(大夏, 박트리아)ㆍ안식국(安式國, 이란)ㆍ조지(趙地, 시리아)ㆍ신독국(新獨國, 인도) 등을 거쳐 귀국한 후 서역의 지리, 민족, 산물 등을 한무제에게 보고하여 서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도록 실크로드를 개척했습니다.
한나라는 서역으로의 통상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BC 68년 정길(鄭吉, ?~ BC 48년)을 통해 차사국(車師國)을 정복하고, BC 59년 흉노의 일축왕(日逐王)을 정벌하여 룬타이(輪臺)에 오루성(烏壘城)을 짓고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세워 서역 36국을 속국으로 다스렸습니다.
한나라는 서역으로의 통상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BC 68년 정길(鄭吉, ?~ BC 48년)을 통해 차사국(車師國)을 정복하고, BC 59년 흉노의 일축왕(日逐王)을 정벌하여 룬타이(輪臺)에 오루성(烏壘城)을 짓고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세워 서역 36국을 속국으로 다스렸습니다.
반초(班超, 32~102년)는 91년 쿠차(庫車)로 서역도호부를 옮기고, 97년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흉노와 훈족을 정벌하고 서로는 카스피해와 바그다드 인근까지 기지를 확장했습니다. 100년 반초가 낙양으로 돌아와 사망한 후 서역도호부는 흉노와의 패권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였고,
107년 흉노족의 세력이 강성해져 한나라는 서역도호부를 잃고 영향력을 상실했습니다. 166년 대진국(大秦國, 로마제국) 안돈(安敦,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은 한나라와의 직접적인 교역을 원하며 바다를 통해 사신을 파견했습니다.
동진(東晋)의 고승 법현(法顯, 337?~422년 추정)은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고 경전을 구하기 위해 399년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난주(蘭州)ㆍ돈황(敦煌)ㆍ누란(樓蘭)ㆍ카라샤르(焉耆)ㆍ허톈(和田)ㆍ카슈가르(喀什)를 거쳐 천축(天竺)에 도착했습니다.
동진(東晋)의 고승 법현(法顯, 337?~422년 추정)은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고 경전을 구하기 위해 399년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난주(蘭州)ㆍ돈황(敦煌)ㆍ누란(樓蘭)ㆍ카라샤르(焉耆)ㆍ허톈(和田)ㆍ카슈가르(喀什)를 거쳐 천축(天竺)에 도착했습니다.
414년에 해로(海路)를 통해 장안에 돌아올 때까지 15년간 30개국을 순례하였고, 그의 여행기 '불국기(佛國記)'는 인도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서유기(西遊記)'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당(唐)나라의 고승 현장(602?~664년)은 629년 장안을 출발하여 돈황ㆍ투르판ㆍ카라샤르ㆍ쿠차ㆍ바이ㆍ타쉬켄트ㆍ사마르칸트ㆍ대하의 도읍 헤라트ㆍ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에 도착했고, 인도에서 몇 년을 머문 후 다시 육로를 통해 645년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장이 쓴 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가치가 있습니다. 640년 당나라는 투르판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아래에 안서사진을 두고
90여 개의 속주를 다스림으로서 안정된 교역로를 바탕으로 실크로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 서방과의 교역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특히 조로아스터교ㆍ마니교ㆍ로마 교회에서 이단시되던 네스토리우스파도 중국으로 전래되었습니다.
723년 혜초(慧超, 704~787년)는 장안에서 수행하던 중 인도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기로 하고 광주에서 배를 타고 말레이 반도를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몇 년을 머무른 후 인도의 서북부에서 대하(大夏)의 북부를 통해
723년 혜초(慧超, 704~787년)는 장안에서 수행하던 중 인도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기로 하고 광주에서 배를 타고 말레이 반도를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몇 년을 머무른 후 인도의 서북부에서 대하(大夏)의 북부를 통해
타슈쿠르칸을 넘어 카슈가르를 통과하고 쿠차ㆍ언기ㆍ고창을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는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각국의 종교ㆍ정치ㆍ경제ㆍ풍속을 기록한 매우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755년 안사의 난과 790년 토번의 타림분지 진출로 당나라는 안서도호부를 잃고 영향력을 상실했습니다. 이후 서역의 동부는 위구르인들이, 서부는 이슬람 세력이 점거하여 실크로드는 파미르 고원에서 끊겨 서역과의 직접적인 교역은 단절되었습니다.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운남성의 중앙아시아 이슬람 출신의 환관 정화(鄭和, 1371~1433?년)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남해 원정대를 이끌고 남중국~인도양~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바닷길을 개척했습니다.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운남성의 중앙아시아 이슬람 출신의 환관 정화(鄭和, 1371~1433?년)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남해 원정대를 이끌고 남중국~인도양~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바닷길을 개척했습니다.
1405년 소주를 출발한 1차 원정 때 장병 27,800여 명이 분승한 총 317척의 대선단은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들을 물리치고, 인도 캘커타까지 도달해 진국(鎭國) 비를 건립했습니다. 1431년 마지막 7차 원정 때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들렀고, 케냐 스와힐리 해안까지 항해했습니다.
정화의 원정은 중국인들에게 남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으며, 동남아시아에 화교의 증가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선 정화의 원정은 문신들의 환관에 대한 견제로 원양선이 제거되고
무역이 금지되면서 더이상의 해양개척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명나라는 급속히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과 가욕관ㆍ돈황ㆍ하미ㆍ투르판에서 피비린내 나는 영토 쟁탈전을 거듭했습니다.
18세기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가 투르판을 정복하면서 실크로드의 정세가 안정되는 듯 했으나, 지속적인 전쟁과 부패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면서 서양의 아편이 들어오는 등 급격하게 몰락했습니다. 19세기 들어 오늘날까지 신강위구르자치구 위구르인들의 열망이 수시로 분출되고 있습니다.
18세기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가 투르판을 정복하면서 실크로드의 정세가 안정되는 듯 했으나, 지속적인 전쟁과 부패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면서 서양의 아편이 들어오는 등 급격하게 몰락했습니다. 19세기 들어 오늘날까지 신강위구르자치구 위구르인들의 열망이 수시로 분출되고 있습니다.
석식 (현지식)
난석빈관(蘭石賓館, 준5성급) OR 동급
투숙호텔안내
숙박없음
- [조식]
- [중식] 기내식
- [석식] 현지식
2일차2017-07-23 (일)
난주
조식 (호텔식)
▣ 고대 실크로드(SILK ROAD)의 핵심 하서주랑(河西走廊)
'황하(黃河)의 서쪽에 긴 복도' 모양으로 하서주랑 또는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 불리며 난주(蘭州)와 무위(武威)ㆍ장액(張掖)ㆍ주천(酒泉)ㆍ돈황(敦煌) 등 하서사군(河西四郡)을 포함하는 고대 실크로드의 가장 핵심이 되는 지역입니다.
고대 중국과 서방 세계의 정치ㆍ경제ㆍ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국제 교역로 하서주랑은 동쪽의 오초령부터 서쪽의 옥문관(玉門關)까지 약 900Km, 남쪽의 기련산(祁連山)과 아얼진산(阿爾金山)부터 북쪽의 마종산(馬?山)과 합려산(合黎山) 및 용수산(龍首山)까지 100Km 미만으로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은 평지입니다.
황하 유역에 위치하는 감숙성 성도(省都) 난주(蘭州)는 해발 1,500m로, 황토(黃土)고원과 몽신(蒙新)고원의 과도지대이며, 예로부터 실크로드의 교역지로 번성했습니다.
황하 유역에 위치하는 감숙성 성도(省都) 난주(蘭州)는 해발 1,500m로, 황토(黃土)고원과 몽신(蒙新)고원의 과도지대이며, 예로부터 실크로드의 교역지로 번성했습니다.
한(漢)나라 때 금성현(金城縣)이 설치되었고, 수(隋)나라 때 지금의 지명으로 개명했습니다. 안사(安史)의 난(亂) 이후 토번의 땅이었고, 청(淸)나라 때에는 난주부(府)로 개칭했습니다.
☞ 양주(凉州)로 불리던 무위(武威)로 이동 (245Km, 3시간 소요)
☞ 양주(凉州)로 불리던 무위(武威)로 이동 (245Km, 3시간 소요)
무위.
▣ 하서사군(河西四郡) 무위(武威)
무위는 BC 101년 한무제(漢武帝 劉徹, BC 156~BC 87년)가 흉노(匈奴)의 곤사왕(昆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을 정벌하고 군(郡)을 설치한 무용위력(武勇威力)에서 도시명이 유래합니다. 실크로드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그 이름이 알려져 왔으며,
이민족에 의한 최초의 중국 지배가 시작된 5호 16국(五胡十六國, 304~439년) 시대에는 전량(前凉, 301~376년)을 비롯한 5왕조의 도읍이었고, 삼국(三國)의 위(魏)나라 이후 양주(凉州)로 불렸으며,
당(唐)나라 때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 실크로드를 개척해 '중국 산맥의 제왕'으로 불렸던 고선지(高仙芝, ?~756년) 장군이 태어난 곳입니다.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을 남긴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년)에 의해 '에르기울(Ergiuul)'로 알려졌습니다.
▶하서사군의 하나인 무위의 [양주고성(凉州古城)]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삼론종(三論宗)의 조사(祖師)로 불리는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년)이 17년간 머물렀던 [구마라습사(鳩摩羅什寺)]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삼론종(三論宗)의 조사(祖師)로 불리는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년)이 17년간 머물렀던 [구마라습사(鳩摩羅什寺)]
- 구마라습사에는 구마라습의 혀(舌)사리탑을 비롯해 산문, 대웅보전, 장경루, 반야 강당, 구마라습 조사 기념당, 구마라습 불학원, 구마라습 불교문화연구소, 구마라습 삼장원, 관방(關房), 염불당, 불교교육시청도서관, 불교 서화원, 불교 박물관, 불교자제중심(佛敎慈濟中心) 등이 있습니다.
인도의 귀족 구마라염(鳩摩羅炎)과 구자국(龜玆國) 왕의 누이동생 기바(耆婆) 사이에서 태어난 쿠차 출신의 인도 승려 구마라습은 어머니를 따라 7세 때 출가하여, 여러 곳을 편력하다가 인도 북쪽 계빈(현재 카슈미르)에서 반두달다(槃頭達多)에게서 소승교(小乘敎)를 배우고,
소륵국(疏勒國)에서 수리야소마(須梨耶蘇摩)로부터 용수(龍樹)의 대승교(大乘敎)를 배운 후 구자국으로 돌아와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서 율(律)을 배우고, 대승교를 포교했습니다.
383년 전진(前秦, 351~394년)의 왕 부견(符見, 338~385년)은 당시 실크로드에 명성이 높았던 구마라습을 영입하기 위해 장군 여광(呂光, 338~399년)을 시켜 구자국을 멸망시켰습니다.
383년 전진(前秦, 351~394년)의 왕 부견(符見, 338~385년)은 당시 실크로드에 명성이 높았던 구마라습을 영입하기 위해 장군 여광(呂光, 338~399년)을 시켜 구자국을 멸망시켰습니다.
구마라습을 양주로 모셔갔으나 부견이 동진(東晉, 317~419년)과의 비수 전투에서 패하면서 나라가 없어지자 여광은 양주에 후량(後凉, 386~403년)을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여광은 35살 밖에 되지 않은 푸른 눈의 수행자를 사나운 말과 소의 등에 태운 후 떨어뜨리며 놀았고, 구마라습이 떠나지 못하도록 하려고 결혼하지 않으면 여인을 죽이겠다고 협박해 강제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파계승으로서 견디기 힘든 양주에서의 17년의 긴 연금기간은 구마라습으로 하여금 중국어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게 했으며, 그의 사상을 더욱 깊어지게 했습니다.
그 뒤 후진(後秦, 384~417년)의 왕 요흥(姚興, 366~416년)이 양주를 공격한 후 401년 우여곡절 끝에 구마라습을 국사(國師)로 장안(長安)에 모셔갔습니다.
그 뒤 후진(後秦, 384~417년)의 왕 요흥(姚興, 366~416년)이 양주를 공격한 후 401년 우여곡절 끝에 구마라습을 국사(國師)로 장안(長安)에 모셔갔습니다.
그는 장안의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 등에 있으면서 '성실론', '십송률', '대품반야경', '묘법연화경', '아미타경', '중론', '십주비바사론' 등 중국 최초로 경률 74부 380여 권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대승불교 반야사상의 핵심을 담은 경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독송되는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지혜제일(智慧第一)의 제자 사리불(舍利弗)에게 아미타불이 머물고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에 대해 설법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아미타경(阿彌陀經)'의 '극락(極樂)',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의 '번뇌시도량(煩惱是道場, 번뇌 안에 깨달음이 있다)'은 모두 그가 남긴 말입니다.
훗날 구마라습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연못에서 연꽃만 볼 뿐, 진흙은 보지 말라.'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던 파계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고, 번역한 경으로 깨달음의 꽃을 피우라는 뜻입니다. 진체(眞諦, 499~569년), 현장(602?~664년), 불공금강(不空金剛, 705~774년)과 함께 산스크리트 불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중국 불교 4대 역경가(譯經家)로 불리는 구마라습은 입적하기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매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전을 번역했다.
예언한다. 내가 번역한 것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증거로 사후 나를 화장한 후에도 분명히 내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다비한 후, 그의 몸은 다 탔지만 혀는 조금도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많은 인생에서 그가 수없이 번뇌하고 인내함으로써 중국의 대승불교가 발전할 수 있었고,
'연못에서 연꽃만 볼 뿐, 진흙은 보지 말라.'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던 파계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고, 번역한 경으로 깨달음의 꽃을 피우라는 뜻입니다. 진체(眞諦, 499~569년), 현장(602?~664년), 불공금강(不空金剛, 705~774년)과 함께 산스크리트 불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중국 불교 4대 역경가(譯經家)로 불리는 구마라습은 입적하기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매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전을 번역했다.
예언한다. 내가 번역한 것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증거로 사후 나를 화장한 후에도 분명히 내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다비한 후, 그의 몸은 다 탔지만 혀는 조금도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많은 인생에서 그가 수없이 번뇌하고 인내함으로써 중국의 대승불교가 발전할 수 있었고,
다시 한국에 유입되어 불교가 융성해질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일본까지 불교가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 3,000여 명 가운데 도생(道生)ㆍ승조(僧肇)ㆍ도융(道融)ㆍ승예(僧叡)를 가리켜 습문(什門)의 4철(四哲)이라고 합니다.
▶날아오르는 제비를 밟고 달릴 만큼 빠르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오늘날 중국 관광의 상징이자 무위의 상징인 마답비연(馬踏飛燕)이 출토된 뢰대(雷臺)의 [뢰대한문화진열관(雷臺漢文化陳列館)]
▶날아오르는 제비를 밟고 달릴 만큼 빠르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오늘날 중국 관광의 상징이자 무위의 상징인 마답비연(馬踏飛燕)이 출토된 뢰대(雷臺)의 [뢰대한문화진열관(雷臺漢文化陳列館)]
- 전량(前凉, 301~376년)의 국왕 장궤(張軌)가 천둥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세운 높이 8.5m, 길이 106m, 폭 60m의 령조대(靈釣臺) 위에 명나라 중엽 뢰조관(雷祖觀)을 조성해 '뢰대(雷臺)'라고 불렀습니다.
1969년 10월 한 농민이 지하도를 파다가 뢰대 아래에서 발견한 동한(東漢) 말기의 대형 전실묘에서 금ㆍ은ㆍ동ㆍ철ㆍ옥ㆍ뼈ㆍ돌ㆍ자기 등 진귀한 문물 231점과 고대 화폐 3만 닢이 출토되었습니다.
출토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동으로 정교하게 주조된 99개의 차마의장용(車馬儀仗俑)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은 높이 34.5Cm, 길이 45Cm, 무게 7.15Kg의 동분마는 제비를 밟고 달릴 만큼 빠르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1971년 9월 감숙성박물관을 참관하던 궈모뤄(郭沫若)가 '마답비연'이라고 칭했습니다.
- 뢰대한문화진열관에는 한무제 시기 하서주랑을 지배했던 흉노의 태자 투후 김일제의 소상이 있는데,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년) 비문에는 '투후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5행)',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는 구절을 통해 시조인 성한왕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2009년 7월 18일 방송된 KBS 역사 스페셜에서는 문무왕의 비문을 근거로 투후는 김일제를, 성한왕은 투후의 7대 손이라는 견해로 방송했습니다.
김일제는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장남으로 한무제의 명을 받은 곽거병이 흉노족을 정벌하면서 서안으로 끌려와 말을 기르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후 김일제는 한무제의 눈에 띄어 노예에서 해방되어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고, 이후에는 시중(侍中)ㆍ부마도위(附馬都衛)ㆍ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습니다.
김일제는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장남으로 한무제의 명을 받은 곽거병이 흉노족을 정벌하면서 서안으로 끌려와 말을 기르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후 김일제는 한무제의 눈에 띄어 노예에서 해방되어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고, 이후에는 시중(侍中)ㆍ부마도위(附馬都衛)ㆍ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습니다.
한무제의 암살을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모시고 천주(天主)에 제사지냈던 것에서 연유하여 한무제로부터 김씨 성을 하사받았습니다. 한무제가 죽으면서 김일제와 곽광(藿光)에게 어린 아들 유불릉(劉弗陵, 漢昭帝)의 후견인을 부탁할 만큼 김일제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한소제는 김일제가 죽기 전 그를 산동성 일대를 다스리는 투후에 봉했고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관직을 세습하였고, 김일제는 사후 곽거병과 함께 한무제의 무릉 옆에 배장되었습니다. 훗날 김일제의 후손들은 인척인 왕망(王莽)을 도와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 나라를 건국했으나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에 의해 신나라가 멸망하면서 가문도 쇠락했습니다.
무위에서 북쪽으로 1시간 외곽의 작은 마을 김가장(金家庄)에는 800여 명의 주민 중 자신들이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600여 명의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무위에서 북쪽으로 1시간 외곽의 작은 마을 김가장(金家庄)에는 800여 명의 주민 중 자신들이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600여 명의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산동성 하택(?澤)에는 투국(?國)의 표지석이 있는데 김일제의 성(姓)을 따라 투국의 성(城)을 금성(金城)이라고 하는데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있던 금성(金城)과도 그 명칭이 동일합니다.
또한, 신라 김씨의 무덤과 흉노의 무덤양식도 동일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며, 흉노의 근거지에서 발견된 동복(銅?, 청동 솥)과 기마 인물상 역시 신라의 것과 동일한데 이는 단순한 우연만은 아닌듯합니다.
중식 (호텔식)
☞ 한ㆍ명대 축조한 장성을 조망하며 칠채산으로 이동 (275Km, 3시간 45분 소요)
▣ 중국의 야심찬 新실크로드 정책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2013년 9~10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앙아시아ㆍ동남아시아 순방에서 처음 제시한 일대일로(一帶一路)는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육상 실크로드(一帶, one Belt)와 동남아시아와 유럽ㆍ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一路, one Road)를 뜻하는 정책입니다.
육상 실크로드는 서쪽, 해상 실크로드는 남쪽으로 확대해 600년 전인 1405~1433년 명나라 정화(鄭和, 1371~1433?년)의 남해 원정대가 7회에 걸쳐 개척한 남중국~인도양~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바닷길을 장악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육상 실크로드는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시작해 감숙성~청해성~섬서성~내몽고자치구~길림성~흑룡강성까지 이어지며, 해상 실크로드는 광주~심천~상해~청도~대련 등 동남부 연안도시를 연결합니다.
육상 실크로드는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시작해 감숙성~청해성~섬서성~내몽고자치구~길림성~흑룡강성까지 이어지며, 해상 실크로드는 광주~심천~상해~청도~대련 등 동남부 연안도시를 연결합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ㆍ남아시아ㆍ서아시아를 연결하는 핵심거점으로는 신강위구르자치구가, 동남아로 나가기 위한 핵심거점으로는 운남성이, 극동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핵심거점으로는 동북 3성(省)이, 내륙 개발을 위한 핵심거점으로는 서안이, 아시아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의 거점으로는 복건성이 중점적으로 활용ㆍ개발됩니다.
일대일로가 구축되면 중국을 중심으로 유라시아부터 아프리카까지 육ㆍ해상 실크로드 주변의 60여 개국을 포함하는 거대 경제권이 고속철도망을 통해 중앙아시아~유럽~아프리카로 연결됩니다. 이를 통해 대규모 물류 허브 건설, 에너지 기반시설 연결, 참여국 간의 투자 보증 및 통화 스와프 확대 등의 금융 일체화를 목표로 합니다.
일대일로가 구축되면 중국을 중심으로 유라시아부터 아프리카까지 육ㆍ해상 실크로드 주변의 60여 개국을 포함하는 거대 경제권이 고속철도망을 통해 중앙아시아~유럽~아프리카로 연결됩니다. 이를 통해 대규모 물류 허브 건설, 에너지 기반시설 연결, 참여국 간의 투자 보증 및 통화 스와프 확대 등의 금융 일체화를 목표로 합니다.
2049년 완성을 목표로 인프라 건설 규모는 1조 400억 위안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위해 중국은 400억 달러에 달하는 新실크로드 펀드를 마련하고,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를 통해 인프라 구축을 뒷받침할 계획입니다.
일대일로 구축으로 중국은 안정적 자원 운송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이는 경제 성장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중국의 과잉 생산을 해소하는 방안이 되고, 건설 수요 급증으로 지역 간 균형적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인 외환보유액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세부 방안으로는 정책소통, 시설연통, 무역창통, 자금융통, 민심상통 등 5통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정책소통 : 각 정부 간 전략, 대책 교류 및 협력 강화
▷시설연통 : 도로, 철도 등 교통망과 통신망, 에너지 운송 및 저장을 위한 기초시설 연결
▷무역창통 : 자유무역지대 및 투자무역협력대상 확대(투자 및 무역 장벽 제거)
▷자금융통 : 위안화 국제화, AIIB와 브릭스(BRICS)개발은행 설립 추진
▷민심삼통 : 민간의 문화교류 강화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국으로 뻗어나가는 형태의 일대일로 전략이 중화주의의 부활이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5년 2월 의회에 제출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인 아시아 재균형정책(미국 주도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과 대립되면서 아시아 지역에 대한 두 국가의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일대일로 구축으로 중국은 안정적 자원 운송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이는 경제 성장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중국의 과잉 생산을 해소하는 방안이 되고, 건설 수요 급증으로 지역 간 균형적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인 외환보유액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세부 방안으로는 정책소통, 시설연통, 무역창통, 자금융통, 민심상통 등 5통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정책소통 : 각 정부 간 전략, 대책 교류 및 협력 강화
▷시설연통 : 도로, 철도 등 교통망과 통신망, 에너지 운송 및 저장을 위한 기초시설 연결
▷무역창통 : 자유무역지대 및 투자무역협력대상 확대(투자 및 무역 장벽 제거)
▷자금융통 : 위안화 국제화, AIIB와 브릭스(BRICS)개발은행 설립 추진
▷민심삼통 : 민간의 문화교류 강화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국으로 뻗어나가는 형태의 일대일로 전략이 중화주의의 부활이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5년 2월 의회에 제출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인 아시아 재균형정책(미국 주도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과 대립되면서 아시아 지역에 대한 두 국가의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형형색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모습으로 일명 '무지개산'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단하지모(丹霞地貌) 계곡에 펼쳐진 화려한 대지의 예술작품 [칠채산(七彩山) 일몰 감상]
- 칠채산의 정식 명칭은 장액단하국가지질공원(張掖丹霞國家地質公園)이며, 단하(丹霞)는 '붉은 노을'을 의미합니다. 칠채산은 오랜 세월 쌓인 퇴적층이 지각변동과 풍화작용에 의해 형성된 붉은 사암이 층마다 퇴적층의 내용에 따라 다른 색깔을 띄며 멋진 경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부를 순환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다섯 곳의 전망 포인트를 볼 수 있습니다.
석식 (현지식)
☞ 장액(張掖)으로 이동 (35Km, 45분 소요)
장예
♣ 예정호텔 : 장액빈관(張掖賓館, 5성급)/천역국제주점(天域國際酒店, 준5성급) OR 동급
투숙호텔안내
숙박없음
- [조식] 호텔식
- [중식] 호텔식
- [석식] 현지식
3일차2017-07-24 (월)
장예
조식 (호텔식)
▣ 하서사군(河西四郡) 장액(張掖)
감숙성 하서주랑 중부에 위치하는 오랜 역사의 장액의 지명은 '장국의 비액, 서역으로 통하는 성(張國臂掖, 以通西域)'에서 유래합니다. 한무제의 명으로 곽거병이 흉노를 물리친 후 물과 비옥한 토지로 산물이 풍부하여 '금장액(金張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마르코 폴로(1254~1324년)가 1년간 머물렀으며, 유럽에는 '칸피추'로 알려진 곳입니다. 감숙성(甘肅省)의 명칭은 장액의 옛 지명 감주(甘州)와 주천의 옛 지명 숙주(肅州)에서 따온 것입니다.
▶1507년 명나라 때 서안의 종루를 모방해 만든 [종고루(鍾鼓樓)]
▶1507년 명나라 때 서안의 종루를 모방해 만든 [종고루(鍾鼓樓)]
- 고루(鼓樓)ㆍ진원루(鎭遠樓)ㆍ정원루(靖遠樓)라고도 불리며, 청나라 때인 1648년 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668년 건륭황제 때 중수되었습니다. 건축물 사방에는 '九重在望, 萬國咸賓, 聲敎四達, 湖山一覽'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누각의 남동쪽에 있는 당대(唐代)에 만들어진 동종에는 3층으로 된 도안이 있는데, 각 층마다 6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상층부의 3칸에는 우아한 형태의 비천(飛天)이 묘사되어 있고, 중간층에는 주작(朱雀)과 현무(玄武)가, 아래층에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종은 중요한 보고나 화재의 위험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 주천(酒泉)으로 이동 (210Km, 2시간 30분 소요)
▣ 하서사군(河西四郡) 주천(酒泉)
☞ 주천(酒泉)으로 이동 (210Km, 2시간 30분 소요)
▣ 하서사군(河西四郡) 주천(酒泉)
서역으로 가는 교통과 군사요충지 주천은 당(唐)나라 시대에는 토번(吐蕃, 현재 티베트)의 땅이고, 원(元)ㆍ명(明)ㆍ청(淸) 시대에는 숙주(肅州)라고 불렸습니다.
주천에는 각 방향별로 '東迎華岳, 西達伊吾, 南望祁連, 北通沙漠'이라고 쓰인 액자를 볼 수 있는 종고루(鍾鼓樓)와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무제가 내린 술이 많은 병사들이 마시기에 부족하자 곽거병이 샘에 술을 붓자 샘에서 술 향기와 함께 술이 솟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주천공원(酒泉公園)이 있습니다.
▶실크로드 개척시기 한무제(漢武帝 劉徹, BC 156~BC 87년)의 명으로 흉노(匈奴)를 정벌한 곽거병(BC 140~BC 117년)의 전설이 전해지는 [주천공원(酒泉公園)]
- 한무제는 즉위 후 장건(張騫, ?~BC 114년)을 통해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이후 위청(衛靑, ?~BC 106년)과 곽거병 등을 통해 흉노를 정벌하면서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 태자 김일제의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하는 등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고 서역과 흉노 출신의 노예까지도 인재로 등용했습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유학을 바탕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한편, BC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낙랑ㆍ임둔ㆍ진번ㆍ대방)을 설치하는 등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만들면서 전한(前漢) 최고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한무제가 영면에 잠든 무릉(茂陵) 주변에는 한무제의 만년 총애를 독차지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주인공 이부인(李夫人)ㆍ평양공주(平陽公主)ㆍ위청ㆍ곽거병ㆍ김일제ㆍ곽광(?~BC 68년) 등의 배장묘가 있습니다.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는 한고조 유방(劉邦, BC 266/247?~BC 195년)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의 후손인 평양후(平陽侯) 조수와 결혼하면서 그의 봉호를 따라 평양공주로 불렸습니다. 평양공주의 시녀 위온에게는 1남 3녀가 있었는데,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는 한고조 유방(劉邦, BC 266/247?~BC 195년)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의 후손인 평양후(平陽侯) 조수와 결혼하면서 그의 봉호를 따라 평양공주로 불렸습니다. 평양공주의 시녀 위온에게는 1남 3녀가 있었는데,
그 중 관리 정계와 사통해 낳은 아들 위청은 아버지 쪽 식구들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가 일하는 평양공주의 집에서 노복이 되었습니다. 평양공주는 위온의 딸 위자부(?~BC 91년)가 빼어난 미모와 자질로 한무제의 관심을 받자 위자부를 입궁시켰고,
BC 131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공주는 재혼할 상대를 물색하던 중 주변 사람들의 천거로 위자부의 동생 위청과 재혼했고, 한무제의 총애를 받은 위자부는 BC 128년 태자 거(據)를 낳고 위황후가 되었습니다.
위황후의 언니 위소아가 곽중유와 밀통하여 낳은 곽거병은 무예가 뛰어나고 용감하여 18세 때 시중(侍中)이 되었고, 곧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 공을 세워 관군후(冠軍侯)로 봉해졌고, BC 120년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어 하서주랑으로 출정하고, 그해 여름에는 북방으로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위황후의 언니 위소아가 곽중유와 밀통하여 낳은 곽거병은 무예가 뛰어나고 용감하여 18세 때 시중(侍中)이 되었고, 곧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 공을 세워 관군후(冠軍侯)로 봉해졌고, BC 120년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어 하서주랑으로 출정하고, 그해 여름에는 북방으로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6차례의 흉노정벌에서 정예부대를 이끌고 대군(大軍)보다 먼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전법을 써서, 한나라 영토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워 위청과 함께 대사마(大司馬)가 되었고, 그 권세는 위청을 능가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24세로 곽거병이 죽자 한무제는 크게 슬퍼하며, 곽거병이 대승리를 거둔 기련산(祁連山)의 형상으로 그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 이백(李白)의 시(詩) '월하독작(月下獨酌)'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하늘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고,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땅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이 없었으리라.
▶1838년 청나라 때 만들어진 [종고루(鍾鼓樓)]
- 이백(李白)의 시(詩) '월하독작(月下獨酌)'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하늘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고,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땅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이 없었으리라.
▶1838년 청나라 때 만들어진 [종고루(鍾鼓樓)]
☞ 가욕관으로 이동 (20Km, 40분 소요)
가욕관.
▣ 만리장성의 서쪽 끝ㆍ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가욕관
▣ 만리장성의 서쪽 끝ㆍ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가욕관
만리장성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며 천하제일웅관으로 불리는 가욕관은 명(明)나라 최서부의 국경도시로서 군사요충지였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건국한 청(淸)나라가 가욕관에서 서쪽으로 1,000Km의 영토를 더 확장하면서 군인들이 철수하자 가욕관은 실크로드 국경도시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방치되어 황폐해졌으나 최근 만리장성의 서쪽 끝을 보고자 하는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서서히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중식 (호텔식)
▶만리장성의 서쪽 끝,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가욕관 성채-전동카]
-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에서 시작하여 동쪽 끝 산해관(山海關)까지 약 2,700km에 걸쳐 축성된 만리장성은 인류가 만든 최대의 건축물입니다. 현재의 가욕관은 명나라 때 축성된 높이 11m의 성벽과 33,500㎡ 면적으로 천하웅관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문창각(文昌閣), 관우(關羽)를 기리는 사당 관제묘(關帝廟), 1792년 청나라 건륭(乾隆) 15년 병사들을 위로하는 공연장으로 만들어진 희대(戱臺), 가욕관을 지휘하는 장군이 머물던 유격장군부(游擊將軍府)가 있으며, 내성에는 동쪽의 광화문(光化門)과 서쪽의 유원문(柔遠門)이 있는데, 각각의 문 위에는 높이 17m의 3층 누각이 있습니다.
☞ 돈황(敦煌)으로 이동 (375Km, 4시간 30분 소요)
돈황.
▣ 실크로드 최고의 오아시스ㆍ하서사군(河西四郡) 돈황(敦煌)
사막 한가운데 위치하는 돈황은 예로부터 '모래 마을'을 의미하는 사주(沙州)라고 불렸습니다. BC 111년 한무제는 최서부의 중요한 군사요충지인 돈황에 하서사군의 하나인 돈황군을 설치하고, 외곽에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 두 개의 관문을 만들었습니다.
돈황은 안정된 치안을 바탕으로 당나라 때에는 동서양의 문물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실크로드 최고의 오아시스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며, 한인ㆍ페르시아인ㆍ투르크인ㆍ인도인 등 여러 민족들이 공존해 살던 국제적인 도시로 번성했습니다.
석식 (호텔식)
▶돈황 시민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사주(沙州) 야시장]
♣ 예정호텔 : 양광사주대주점(陽光沙州大酒店, 5성급) OR 동급
투숙호텔안내
숙박없음
- [조식] 호텔식
- [중식] 호텔식
- [석식] 호텔식
4일차2017-07-25 (화)
돈황
조식 (호텔식)
▣ 특전 : 낙타를 타고 명사산에 오르는 [카라반(Caravan-1시간 소요)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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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대상들이 낙타에 짐을 싣고 서역을 오가던 실크로드의 화려한 옛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동서 40Km, 남북 20Km의 광활한 사막으로 모래(沙)가 우는 소리(鳴)처럼 들려 명명된 [명사산(鳴沙山)]
▶사막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초생달 모양의 오아시스 [월아천(月牙泉)-전동카]
▣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張騫, ?~BC 114년)
▶수많은 대상들이 낙타에 짐을 싣고 서역을 오가던 실크로드의 화려한 옛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동서 40Km, 남북 20Km의 광활한 사막으로 모래(沙)가 우는 소리(鳴)처럼 들려 명명된 [명사산(鳴沙山)]
▶사막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초생달 모양의 오아시스 [월아천(月牙泉)-전동카]
▣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張騫, ?~BC 114년)
한나라 초기 대외정책에서 가장 큰 과제는 흉노를 견제하고 제압하는 것이었습니다. BC 200년 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 BC 234년경~BC 174년, 재위 BC 209~BC 174년)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해 산서성 동쪽 평성에서 32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 한고조 유방(劉邦, BC 266/247?~BC 195년)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유방은 백등산으로 쫓겨 7일간 포위당하자 항복하고 겨우 장안으로 도망쳤고, 이후 묵특에게 황실의 공주를 시집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으나 한고조 사후에도 조공을 통한 평화정책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한무제(BC 156~BC 87)는 월지(月氏)가 묵특선우에게 패해 서방으로 쫓겨났고, 노상선우(老上單于, ?~BC 161년, 재위 BC 174~BC 161년) 때 월지 왕이 살해되어 흉노가 월지 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삼았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한무제(BC 156~BC 87)는 월지(月氏)가 묵특선우에게 패해 서방으로 쫓겨났고, 노상선우(老上單于, ?~BC 161년, 재위 BC 174~BC 161년) 때 월지 왕이 살해되어 흉노가 월지 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삼았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흉노에 대해 깊은 원한과 복수심을 품은 월지와 동맹을 맺어 흉노를 제압할 계획으로, 한무제는 BC 139년경 장건을 비롯한 100여 명의 사신단을 월지로 파견했습니다.
월지의 위치도 모르는 상태에서 흉노를 지나는 위험한 여정에서 장건 일행은 흉노 군신선우(軍臣單于, ?~BC 126년, 재위 BC 160~126년)에게 포로로 잡혔고, 억류 10여 년 동안 장건은 흉노 여인을 처로 얻어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월지의 위치도 모르는 상태에서 흉노를 지나는 위험한 여정에서 장건 일행은 흉노 군신선우(軍臣單于, ?~BC 126년, 재위 BC 160~126년)에게 포로로 잡혔고, 억류 10여 년 동안 장건은 흉노 여인을 처로 얻어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어렵게 탈출에 성공해 서쪽으로 수십 일을 간 끝에 페르가나 지방의 대완(大宛)에 도착해 호의적인 대완 왕으로부터 월지의 위치를 알아낸 장건은 강거(康居)를 거쳐 소그디아나 지역의 월지에 도착했습니다.
장건은 무제의 뜻을 전하며 월지 왕을 설득했지만 당시 월지는 비옥한 땅에서 풍요를 누리며 주변 대하(大夏)국을 복속시켜 안정을 누리고 있었기에 굳이 한나라와 동맹하여 흉노를 공격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1년 남짓 월지에 머문 장건은 귀로에 올랐지만 다시 흉노에 사로잡혀 1년 정도 억류되다가, 군신선우가 세상을 떠나고 왕위를 둘러 싼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서 흉노인 아내와 함께 탈출하여 BC 126년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맹을 맺지는 못했지만 장건은 서역에 대한 많은 정보를 무제에게 보고하여 한나라가 대외정책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무제는 장건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했습니다.
대하(大夏)에서 신독(身毒, 인도)을 거쳐 촉(蜀)지방의 산물이 거래되었던 것에 착안하여 흉노를 피해 신독을 거쳐 서역과 교역할 수 있다고 판단한 장건은 무제에게 허락을 얻어 신독으로 가는 길을 찾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와의 전쟁에 참전한 공으로 박망후(博望候)에 봉해진 장건은 무제에게 오손(烏孫)과 연합하여 흉노를 제압한다는 새로운 대책을 건의하여, BC 119년 일행 300명과 함께 오손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선물할 막대한 재물을 갖고 떠났습니다.
장건은 오손 왕의 후대를 받았지만 당시 오손은 내부 권력 다툼이 심했고 흉노에 대한 두려움도 컸던 상황이어서 흉노를 협공하는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장건은 주변 여러 나라에 부사(副使)를 파견하고 오손의 사자 수십 명을 데리고 BC 115년 귀국했습니다.
두 차례의 서역여행에서 장건은 동맹을 맺는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오손과의 동맹은 흉노를 견제하는데 기여했고, 서역 여러 나라들은 장건을 통해 한나라가 막강한 대국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면서 한나라의 영향력이 서역에 미치도록 기여했습니다.
두 차례의 서역여행에서 장건은 동맹을 맺는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오손과의 동맹은 흉노를 견제하는데 기여했고, 서역 여러 나라들은 장건을 통해 한나라가 막강한 대국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면서 한나라의 영향력이 서역에 미치도록 기여했습니다.
이후 많은 나라들이 한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한나라는 무제의 조카 유건(劉建)의 딸 세군(細君)을 오손으로 시집 보냈고, 세군이 죽은 후 황족 유무(劉戊)의 손녀 해우(解憂)를 다시 오손에 보냈습니다.
해우가 오손으로 시집가서 나은 딸들이 사차(莎車, 야르칸드)와 구자(龜玆, 쿠차) 왕의 부인이 되었는데, 이들은 한나라와 서역의 교류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건이 대완ㆍ강거ㆍ월지ㆍ대하ㆍ안식ㆍ신독ㆍ우전ㆍ한미 등 서역 여러 지역에 파견한 부사들도, 각 지역의 한나라에 대한 정치적ㆍ문화적 인식을 높이고 한나라의 서역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장건 이전에도 서역 여러 나라들은 교류하고 있었으나, 왕조 차원에서 공식적인 교류가 이루어짐으로써,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나아가 더 먼 서쪽과 상업적ㆍ문화적ㆍ정치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장건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건 이전에도 서역 여러 나라들은 교류하고 있었으나, 왕조 차원에서 공식적인 교류가 이루어짐으로써,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나아가 더 먼 서쪽과 상업적ㆍ문화적ㆍ정치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장건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식적인 교역의 물꼬가 트이자 서역에서 중국으로 보석, 산호, 공예품, 향료, 석류, 포도, 목재 등이 들어왔고 중국의 견직물을 비롯한 많은 산물들이 서역으로 들어갔습니다.
대완 지역에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 한혈마(汗血馬)가 있다는 장건의 정보를 바탕으로 무제는 BC 104년 표기장군 이광리(李廣利)를 대완에 보내 한혈마를 들여왔습니다.
장건은 오손에서 돌아와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대행령(大行令)에 임명되어 서역 외교분야에서 계속 활동하다가 BC 11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식 (현지식)
▶불교 예술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석굴사원 [막고굴(莫高窟)]
- 실크로드에 관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해 주는 영화 '천년막고(千年莫高)'와 막고굴 내부를 소개하는 입체영화 '몽환불궁(夢幻佛宮)' 관람
- 366년 전한의 승려 낙준(樂尊)에 의해 시작된 석굴사원은 수ㆍ당ㆍ5대 10국ㆍ송ㆍ서하ㆍ원나라를 거치며 1,000여 년간 명사산 동쪽 절벽에 남북으로 1,618m에 735개의 동굴이 조성되었습니다. 현재 492개의 석굴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1,400여 개의 상과 45,000㎡의 벽화가 있으며 화려했던 실크로드의 문화를 대표하는 세계 최대의 석굴사원입니다.
BC 111년 한무제는 흉노족을 정벌하고 한족을 이주시켜 돈황을 서역지배의 거점으로 삼았고,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가 이곳을 거치면서 화려한 문화를 꽃 피웠습니다. 특히 당나라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쳐 가장 활발한 왕래가 이루어지면서 무역 중계지로서 세계적인 '돈황 예술'을 창출했습니다.
492개 동굴마다 빈틈없이 그려진 벽화들은 동양미술의 뿌리로 일컬어지며, 벽화의 내용은 초기에는 민간신화를 주제로, 불교가 전래된 후에는 부처님의 선행, 열반상, 극락세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막고굴에는 당나라 때 불상 중 걸작으로 꼽히는 제45굴의 칠존상을 비롯해 57굴의 보살 벽화, 158굴의 열반상, 285굴의 비천도 등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막고굴에는 당나라 때 불상 중 걸작으로 꼽히는 제45굴의 칠존상을 비롯해 57굴의 보살 벽화, 158굴의 열반상, 285굴의 비천도 등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1908년 16굴 안에 숨겨진 17굴 장경동에서 혜초(慧超, 704~787년) 스님이 5개의 천축국(天竺國, 인도)를 순례한 후 쓴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불교 경전, 황제의 칙령, 티베트 의약서, 위구르족의 토지매매 계약서, 고대 기독교 네스토리우스 경전, 인도 경전, 마니교 경전 등이 발견되었으나,
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일본 등 열강들에 의해 도굴되어 해외로 반출되었습니다. 한편 막고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계 각지의 학자들은 석굴의 벽화와 문서를 해독ㆍ연구하기 위해 돈황을 다녀갔으며, '돈황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날 만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돈황 막고굴 323굴에는 7세기 그려진 장건출사서역도 벽화가 있는데, 한무제가 감천궁(甘泉宮)에서 흉노가 하늘에 제를 지낼 때 쓰는 제천금인(祭天金人)에게 예배하는 모습과 한무제가 장건의 서역 출사를 배웅하는 모습, 장건 일행이 서역의 대하국에 도착해 승려들의 영접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돈황 막고굴 323굴에는 7세기 그려진 장건출사서역도 벽화가 있는데, 한무제가 감천궁(甘泉宮)에서 흉노가 하늘에 제를 지낼 때 쓰는 제천금인(祭天金人)에게 예배하는 모습과 한무제가 장건의 서역 출사를 배웅하는 모습, 장건 일행이 서역의 대하국에 도착해 승려들의 영접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림 옆에 있는 설명을 보면, '한무제가 흉노를 토벌하고 두 개의 금인을 빼앗았는데, 그것을 감천궁에 모셔 놓고 신에게 수시로 제를 올렸다'고 적고 있습니다. 장건 시대는 아직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기 전이었는데, 불교 사적화는 대부분 본토에서 만든 것이지만 서역과 인도에서 전해온 것도 있습니다.
비록 진위가 섞여 있고 일부는 이미 불교신도들에 의해 신격화되어 종교적 색채가 짙지만, 불교의 역사와 중국과 인도의 문화교류사를 연구하는 데에는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장건의 서역여행 8백 년 뒤에 벽화가 그려질 만큼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의 명성은 높았습니다.
석식 (한식)
돈황-난주로 이동 (약11시간15분 소요)
[Y669 20:07 돈황 출발]
[Y669 20:07 돈황 출발]
♣ 숙박 : 열차숙박
투숙호텔안내
숙박없음
- [조식] 호텔식
- [중식] 현지식
- [석식] 한식
5일차2017-07-26 (수)
난주[Y669 07:22 난주 도착]
조식 (특식, 난주우육라면)
▣ 감숙성(甘肅省) 성도(省都) 난주(蘭州)
예로부터 실크로드의 핵심 하서주랑의 출발지로 번성한 난주는 해발 1,500m로 황토고원과 몽신고원의 중간지대에 위치합니다. 200년 역사의 별미요리 난주 우육라면은 청나라 건륭황제 때 유명한 주방장이던 마보우(馬保友)가 대중 음식의 일환으로 개발했습니다.
난주는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들이 많이 거주하여 양고기와 소고기를 이용한 음식이 대중화되었습니다. 회족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난주 라면은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의 식습관에 맞추어 소고기 뼈로 육수를 만들었습니다.
소고기를 고명으로 얹어 먹지만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수타면이라는 것입니다. 약간의 고추기름을 얹고, 신맛을 좋아하는 분은 식초와 생마늘도 곁들여 먹으면 마늘의 상큼함과 면발의 쫄깃함, 면발에 묻은 육수의 고소함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채색 토기, 한(漢)나라의 죽간 등 황하 문명과 불교 예술품, 로마시대의 은 접시, 이슬람 코란, 이란의 동전 등 실크로드의 유물 35만 여점을 전시하는 [감숙성박물관(甘肅省博物館)]
▶채색 토기, 한(漢)나라의 죽간 등 황하 문명과 불교 예술품, 로마시대의 은 접시, 이슬람 코란, 이란의 동전 등 실크로드의 유물 35만 여점을 전시하는 [감숙성박물관(甘肅省博物館)]
- 한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제비를 밟고 날아오르는 말의 역동성을 리얼하게 표현한 마답비연상(馬踏飛燕像)은 최고의 수작으로 꼽힙니다.
☞ 공항으로 이동 (65Km, 1시간 소요)
중식 (현지식)
난주-서안으로 이동 (약1시간10분 소요)
[MU2305 13:50 난주 출발-15:00 서안(西安) 도착]
☞ 시내로 이동 (28Km, 30분 소요)
[MU2305 13:50 난주 출발-15:00 서안(西安) 도착]
☞ 시내로 이동 (28Km, 30분 소요)
서안.
▣ 실크로드의 시발점ㆍ3,000년 역사의 고도(古都) 서안(西安)
3,000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서안은 섬서성(陝西省)의 성도(省都)이자, 중국 6대 고도의 하나입니다. 서안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세운 호경(鎬京)에서 비롯되며,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BC 259~BC 210년)과 그의 사후 세계를 지키는 지하군단 병마용갱 등 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가장 번창했던 당(唐, 618~907년)나라 때에는 장안(長安)으로 불리며 동서 9.5Km, 남북 8.5Km의 규모에 인구 100만이 넘는 국제적인 대도시로서 그 명성을 전세계에 떨쳤습니다.
▶서안이 고대 동서양의 경제ㆍ문화ㆍ종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인류 최고의 교역로 실크로드의 시발점임을 상징하는 [실크로드 조각군(絲綢群雕)]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고성벽으로 명나라 초기 당나라 장안성(長安城)의 기초 위에 건립한 후 수차례 중수를 거쳐 방어체계를 구축한 [서안성벽(西安城壁) 안정문(安定門)]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고성벽으로 명나라 초기 당나라 장안성(長安城)의 기초 위에 건립한 후 수차례 중수를 거쳐 방어체계를 구축한 [서안성벽(西安城壁) 안정문(安定門)]
- 한(前漢=西漢 BC 206~AD 9년 & 後漢=東漢 25~220년)나라의 장안성이 협소하고 궁전ㆍ관아ㆍ민가가 혼재하여 새로운 도성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582~584년 수(隨, 581~618년)나라 때 대흥성(大興城)을 건설했습니다.
당나라는 동서 9,721m, 남북 8,652m, 성벽의 폭 9~12m, 동서남북 각 면에 3개의 성문을 만들고 궁전ㆍ관아ㆍ민가ㆍ사묘ㆍ시장을 구분하여 대흥성을 정비하고 장안성으로 개칭했습니다.
당나라 말기 낙양(洛陽)으로 천도하면서 대부분 파괴된 장안성은 명(明, 1368∼1644년)나라 주원장(朱元璋)이 둘째 아들 주협을 진왕으로 봉하고 서안부(西安府)를 두면서 1374년 성벽의 재건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나라 말기 낙양(洛陽)으로 천도하면서 대부분 파괴된 장안성은 명(明, 1368∼1644년)나라 주원장(朱元璋)이 둘째 아들 주협을 진왕으로 봉하고 서안부(西安府)를 두면서 1374년 성벽의 재건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서ㆍ남쪽은 당나라 장안성 터 위에, 동ㆍ북쪽은 새롭게 만들어 서안성(西安城)을 조성했는데, 서안성의 규모는 당나라 장안성의 1/6에 불과합니다. 이 공사는 1378년까지 진행하여 기초를 완공한 후 1568년 장벽 위쪽 공사와 외벽쪽의 공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1636년 명나라 말기 섬서순무(陝西巡撫) 손전정(孫傳庭, 1593~1643년)이 이자성(李自成, 1606~1645년)의 반란을 막기 위해 네 문의 옹성을 추가로 만들었습니다.
청대에 이르러 열 두차례에 걸친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건륭제 때인 1781년 포와 해자를 추가해 대대적으로 방어능력을 향상시켰습니다.
청대에 이르러 열 두차례에 걸친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건륭제 때인 1781년 포와 해자를 추가해 대대적으로 방어능력을 향상시켰습니다.
성벽은 동서로 길쭉한 장방형으로, 동벽은 2,590m, 서벽은 2,631m, 남쪽 장벽은 3,441m, 북쪽 장벽은 3,241m로 전체 둘레는 13.75Km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12m, 아래에서 15~18m에 이르며, 동서남북으로 장악문(長樂門), 안정문(安定門), 영녕문(永寧門)과 안원문(安遠門) 등 4개의 성문이 있고, 문 밖에는 옹성을 쌓았습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주인공 현장(602?~664년)이 629년부터 645년까지 16년 간의 천축(인도) 기행을 마친 후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보관하고 번역하기 위해 축조한 4각 7층, 높이 67m의 대안탑이 있는 [대안탑(大雁塔)]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주인공 현장(602?~664년)이 629년부터 645년까지 16년 간의 천축(인도) 기행을 마친 후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보관하고 번역하기 위해 축조한 4각 7층, 높이 67m의 대안탑이 있는 [대안탑(大雁塔)]
* 시간지체로 대안탑 입장이 불가능한 경우 석식 후 대안탑 북광장 분수쇼로 대체하여 진행합니다.
- 당(唐)나라 3대 황제인 고종(高宗)이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 문덕황후(文德皇后)를 기리기 위해 만든 황실의 사찰 자은사(慈恩寺)는 당나라 말기 전란으로 소실되었습니다.
석식 (특식, 덕발장 교자연(德發長餃子宴))
▶'종루'와 '고루' 사이에 위치하는 [종고루 광장(鐘鼓樓廣場)]
- 1384년 명나라 때 세워진 종루는 서안 시내의 동서남북 4개 대로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종루에 있는 종을 70회의 타종해 모든 성문을 열도록 신호를 보냈고, 저녁에는 고루에 있는 북을 울려 모든 성문을 닫도록 신호를 보냈습니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소수민족인 회족의 '북원문 이슬람 시장'이 있는 [회민거리(回民街)]
- 다양한 먹거리와 기념품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입니다. 회족은 중국소수민족 중 하나지만 인구가 900만명에 달하며, 서안에만 5~6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 예정호텔 : Branley(吉朗麗大酒店, 5성급)/대안탑 홀리데이인(준5성급)
2017-07-26(수)13:50난주LHW 출발
비행 01시간 10분 MU2305
2017-07-26(수)15:00서안SIA 도착
투숙호텔안내
숙박없음
- [조식] 특식(난주우육라면)
- [중식] 현지식
- [석식] 특식(덕발장 교자연(德發長餃子宴))
6일차2017-07-27 (목)
서안
조식 (호텔식)
▶구석기 시대의 돌칼ㆍ돌도끼 등을 시작으로 주ㆍ진ㆍ한ㆍ위진남북조ㆍ수ㆍ당ㆍ송ㆍ원ㆍ명ㆍ청까지 약 100만 년의 역사가 담긴 37만 점의 소장품을 시대별로 전시하는 [섬서역사박물관(陜西歷史博物館)]
- 섬서역사박물관은 상설전람관(常設展覽館, 제1/2/3전시실), 최신전람관(最新展覽館), 당대벽화진품관(唐代壁畵珍品館), 대당유보전재전(大唐遺寶專題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고조 유방의 황후가 사용한 도장, BC 2세기 중국 최초로 발명된 종이,
당나라 때 황제가 사용한 소 머리 모양의 술잔을 비롯해 한나라 시대의 금화ㆍ금화를 주조하던 틀, 당나라의 금 그릇, 귀족들이 수호신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다양한 장식품, 평민들의 각 시대별 의복과 생활 모습, 당시 유행했던 머리 모양 등에 관한 자료 등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유공권 등 역대 명필들의 친필석각 3,000여 개의 비(碑)가 숲(林)을 이루는 중국 서예 예술의 보고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유공권 등 역대 명필들의 친필석각 3,000여 개의 비(碑)가 숲(林)을 이루는 중국 서예 예술의 보고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
- 745년 당현종이 친히 쓴 서(序)와 주해(注解) 및 글을 새긴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 837년 문종(文宗)의 명으로 역경(易經)ㆍ서경(書經)ㆍ시경(詩經)ㆍ주례(周禮)ㆍ예기(禮記)ㆍ좌전(左傳)ㆍ춘추(春秋)ㆍ논어(論語)ㆍ효경(孝經) 등 12편의 고전을 114개의 비석에 650,000자 이상 새겨 놓은 개성석경비(開成石經),
로마에서 네스토리우스파의 그리스교가 전래된 내용을 담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經敎流行中國碑),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7~365년)의 삼장성교서비(三藏聖敎序碑), 구양순(歐陽詢, 557~641년), 안진경(顔眞卿, 709~785년), 유공권(柳公權, 778~865년) 등 유명한 서예가들의 3,000여 개의 친필석각을 통해 전서ㆍ예서ㆍ해서ㆍ행서ㆍ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볼 수 있습니다.
☞ 임동구(臨潼區)으로 이동 (45Km, 1시간 소요)
☞ 임동구(臨潼區)으로 이동 (45Km, 1시간 소요)
중식 (한식)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중국 대륙을 통일할 당시 거닐던 장군과 병사, 말 등을 흙으로 빚어 구운 테라코타를 만들어 순장한 지하무덤 [병마용박물관(兵馬俑博物館)]
- 진시황릉의 동쪽 1.5Km에 위치하는 1호갱부터 3호갱까지 발굴된 병마용갱은 병사의 보직과 직급에 따라 복장이 다르고, 각기 다른 체형과 표정으로 7,000여 개의 장졸과 100여 개의 전차, 400여 개의 기마상이 발굴되어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1974년 최초로 발굴된 1호 갱은 동서 230m, 남북 62m에 보병 중심의 6,000여 점의 병마용이 발굴된 군진이며, 13열의 궁수부대를 선봉으로 뒤로는 38개 종대(1개 종대는 말 4마리가 포함된 전차가 12대씩 배치된 진나라 군제의 최소 단위)의 본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1976년 발견된 2호 갱은 동서 124m, 남북 98m에 89대의 전차가 포함된 1,300여 점의 병마용이 발굴된 보병, 기병, 전차대, 궁노수들이 각각의 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1976년 발견된 3호 갱은 72점의 병마용과 1대의 전차가 발굴되었으며 1~2호 갱의 지휘부로 추측합니다.
☞ 공항으로 이동 (65Km, 1시간 소요)
☞ 공항으로 이동 (65Km, 1시간 소요)
서안-인천으로 이동 (약3시간5분 소요)
[MU2065 17:35 서안 출발- 21:40 인천 도착]
[MU2065 17:35 서안 출발- 21:40 인천 도착]
석식 (기내식)
기내 작성서류
대한민국 세관신고서(가족당 1매)
인천
입국절차
입국심사(여권) → 수하물 찾기 → 세관통과(세관신고서, 수하물표)
▣ 여행정보 및 취소료 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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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폐 및 환전 : 중국의 화폐는 위안(RMB)이며, 한국에서 위안화를 환전해 가시면 됩니다.
2. 시차 : 한국 시간에서 -1시간 (한국보다 1시간 느림)
3. 전압 : 220볼트
4. 준비물
1) 여권, 지갑, 신용카드
2) 여행용 가방(HARD CASE), 핸드백, 슬리퍼, 핸드백
3) 핸드폰(충전기), 카메라(충전기), MP3(충전기), 노트북(충전기), 헤어 드라이
4) 치솔, 치약, 샴푸, 린스, 화장품, 마스크 팩, 바디 클렌져, 클렌징 폼, 썬크림, 핸드크림, 썬글라스, 면도기, 손톱깎이, 손수건, 여성용품, 접는우산, 수영복(수영장 이용하실 분)
5) 가이드 북, 여행노트, 필기도구, 책
6) 일회용 밴드, 소화제, 지사제 및 개인적으로 평상시 복용하시는 약
7) 입이 짧은 분들은 마른반찬, 고추장, 사발면 등을 준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5. 매너팁 : 아침 호텔 침대에 $1씩, 객실 내에 짐을 운반해 주는 포터에게 $1씩 주는 것이 관례입니다.
6. 한국과 경제적인 통화요령 : 가급적 짧은 단문의 문자를 이용하고, 음성 통화가 필요한 경우 한국에서 중국으로 전화를 걸어 통화하는 것이 44% 저렴합니다.
1) 음성(SK 기준) : 한국→중국 ₩1,232/분, 중국→한국 ₩2,200/분, 중국→중국 ₩770/분
2) 문자(SK 기준) : 수신 무료, 발신 ₩165/건(MMS ₩330~₩440/건)
3) T 로밍 데이터 무제한 사용 정액제 1일 ₩9,900
7. 취소료 규정 : 여행객의 사유로 여행을 취소할 경우 취소시기에 따라 다음의 특별약관을 적용합니다.
1) 출발일 60일 이전 취소시 취소료 없음
2) 출발일 59~30일 취소시 여행경비의 10% 취소료 부과
3) 출발일 29~20일 취소시 여행경비의 20% 취소료 부과
4) 출발일 19~10일 취소시 여행경비의 30% 취소료 부과
5) 출발일 9~1일 취소시 여행경비의 40% 취소료 부과
6) 출발당일 취소시 여행경비의 50% 취소료
1. 화폐 및 환전 : 중국의 화폐는 위안(RMB)이며, 한국에서 위안화를 환전해 가시면 됩니다.
2. 시차 : 한국 시간에서 -1시간 (한국보다 1시간 느림)
3. 전압 : 220볼트
4. 준비물
1) 여권, 지갑, 신용카드
2) 여행용 가방(HARD CASE), 핸드백, 슬리퍼, 핸드백
3) 핸드폰(충전기), 카메라(충전기), MP3(충전기), 노트북(충전기), 헤어 드라이
4) 치솔, 치약, 샴푸, 린스, 화장품, 마스크 팩, 바디 클렌져, 클렌징 폼, 썬크림, 핸드크림, 썬글라스, 면도기, 손톱깎이, 손수건, 여성용품, 접는우산, 수영복(수영장 이용하실 분)
5) 가이드 북, 여행노트, 필기도구, 책
6) 일회용 밴드, 소화제, 지사제 및 개인적으로 평상시 복용하시는 약
7) 입이 짧은 분들은 마른반찬, 고추장, 사발면 등을 준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5. 매너팁 : 아침 호텔 침대에 $1씩, 객실 내에 짐을 운반해 주는 포터에게 $1씩 주는 것이 관례입니다.
6. 한국과 경제적인 통화요령 : 가급적 짧은 단문의 문자를 이용하고, 음성 통화가 필요한 경우 한국에서 중국으로 전화를 걸어 통화하는 것이 44% 저렴합니다.
1) 음성(SK 기준) : 한국→중국 ₩1,232/분, 중국→한국 ₩2,200/분, 중국→중국 ₩770/분
2) 문자(SK 기준) : 수신 무료, 발신 ₩165/건(MMS ₩330~₩440/건)
3) T 로밍 데이터 무제한 사용 정액제 1일 ₩9,900
7. 취소료 규정 : 여행객의 사유로 여행을 취소할 경우 취소시기에 따라 다음의 특별약관을 적용합니다.
1) 출발일 60일 이전 취소시 취소료 없음
2) 출발일 59~30일 취소시 여행경비의 10% 취소료 부과
3) 출발일 29~20일 취소시 여행경비의 20% 취소료 부과
4) 출발일 19~10일 취소시 여행경비의 30% 취소료 부과
5) 출발일 9~1일 취소시 여행경비의 40% 취소료 부과
6) 출발당일 취소시 여행경비의 50% 취소료
2017-07-27(목)17:35서안SIA 출발
비행 03시간 05분 MU2065
2017-07-27(목)21:40인천ICN 도착
투숙호텔안내
숙박없음
- [조식] 호텔식
- [중식] 한식
- [석식] 기내식
쇼핑정보
전 일정 중 총 2회 의 쇼핑센터를 방문합니다.
해외 여행시 US$600 초과 구입한 물품은 입국시 관세가 부과될 수 있으니, 물품 구매시 신중한 선택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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