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옛길 따라 사마르칸트로
아스팔트 포장된 실크로드엔 망국의 한 서린 고려인 아픔 있었다
부하라 역사 간직한 ‘마고키 아토리’
기단은 조로아스터·기둥은 불교양식
건물 재건 때마다 당시 종교상 반영
부하라 마지막 칸 살았던 ‘아르크성’
여름궁전인 ‘쉬토라이 모히’ 매력적
새마을운동 본받아 곳곳서 지역개발
옛 건물 허물어 획일화된 모습 아쉬워
현재 카페트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마고키 아토리 모스크’.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모스크의 기능마저 상실한 이 남루한 건물을 주목하는 이유는 과거 부하라가 불교도시였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적이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 순례서 마주친 현지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무슬림에게는 다섯 가지 의무가 있다. 마음으로 알라를 인정하고, 하루 다섯 번 예배하며, 수입의 40분의1을 헌금하고, 라마단에 금식하며 일주일에 한번 성지 메카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 중 메카에서의 기도는 금요일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해서 매주 금요일이면 모스크마다 예배를 위한 무슬림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부하라 사람들도 신앙을 위해, 교육을 위해 수많은 사원을 쌓아 올렸다. 지금도 많은 사원이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지만, 일부는 박물관이나 상점, 공연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서로 비슷한 모양의 사원이지만 모스크인지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곳인지는 입구를 보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하루 다섯 번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표지가 있으면 모스크, 알림판이 없다면 더 이상 기도처가 아니다.
라비하우즈에 접해있는 ‘마고키 아토리 모스크’는 성지로서의 기능을 다한 곳이다.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의 특산품인 카페트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마고키’는 ‘동굴’, ‘아토리’는 ‘약’을 뜻하는 데 건물 입구가 동굴처럼 생겼고 예전에 이곳 주변에서 약사들이 좌판을 벌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모스크의 기능마저 상실한 이 남루한 건물을 주목하는 이유는 과거 부하라가 불교도시였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적이기 때문이다.
‘아르크성’은 고대 부하라의 발상지다.
마고키 아토리는 1세기경 조로아스터교 사원으로 지어졌다. 이후 외세의 침략을 받아 무너지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사원을 재건할 때면 당시 부하라에 널리 퍼져있던 종교의 양식이 가미됐다. 때문에 기단부터 꼭대기의 돔까지 세 단계에 걸쳐 서로 다른 세 종교의 건축양식을 가진 독특한 건물이 됐다. 마고키 아토리의 기단은 조로아스터교의 아라베스크 양식, 기둥부는 불교, 천장과 돔 부분은 이슬람교의 건축양식이다.
마고키 아토리 옆에는 15세기에 만들어진 ‘굼바스’가 여전히 성업 중이다. 굼바스는 상인들이 좌판을 벌이는 돔형의 상가건물이다. 하나의 굼바스는 또 다른 굼바스와 연결돼 있어 비가 오거나 뜨거운 태양이 내리쫴도 불편 없이 활동할 수 있다. 특히 지하에는 시원한 지하수가 흐르는 수로가 조성돼 있어 굼바스 내부는 항상 선선함을 유지한다. 굼바스에는 상점뿐 아니라 식당, 이발소, 목욕탕 등 편의시설도 갖춰져 있다. 그 옛날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들은 이곳에서 필요한 물건과 정보를 교환하고, 아픈 곳을 치료받고 목욕을 하며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부하라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는 또 다른 장소는 ‘아르크성’이다. 타직어로 ‘커다른 궁궐’이라는 뜻의 이 고성은 고대 부하라의 발상지로, 둘레 780m의 성곽에 4만2000㎡의 면적을 가졌다. 기록에 의하면 7세기 훗다 하우톤 여왕이 이 성에 의지해 이슬람군의 내침에 대항했고, 13세기에는 칭기즈칸 군대에 의해 수많은 이들이 살육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여러 차례 파괴되고 다시 건축되기를 되풀이했으며, 현재의 모습은 18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부하라 왕조의 마지막 칸(왕)인 에미르 사이드 미르알람이 1920년 소련의 붉은군대에 쫓겨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당시는 3000여명이 거주할 만큼 거대했으나 지금은 옛 모습의 3분의1 밖에 남지 않았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입구 양쪽에 죄수들을 가두었던 감옥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면 옥좌가 있던 방과 왕의 거실, 모스크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일부는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5000여년 전의 암각화부터 기원전의 각종 토기, 부하라 유리, 수피즘들의 각종 용기, 왕가에서 사용했던 도자기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마지막 칸 에미르의 여름궁전 ‘쉬토라이 모히 하사’.
도심의 북쪽 외곽에 위치한 궁전 ‘쉬토라이 모히 하사’ 역시 에미르 칸과 관련된 곳이다. ‘달과 별의 궁전’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이곳은 1911년 지어진 여름궁전으로 에미르 칸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로 전해진다. 러시아의 건축가와 현지기술자가 참여해 외관은 서양식이지만 내부는 동양과 이슬람식으로 꾸며졌으니 명실상부한 동서문명의 융합물이다. 궁전 앞마당의 분수는 중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전기를 활용해 물을 뿜었다.
쉬토라이 모히 하사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막의 무더위를 피할 궁전이 필요했던 에미르는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동서남북으로 양 떼를 풀었다. 그 후 양 떼를 조사해보니 이곳에 방목한 양들이 가장 많이 살쪄 있었다. 칸은 “양이 건강하게 자란 곳이 가장 시원하고 건강에 이로운 땅”이라며 이곳에 궁전을 짓도록 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왕의 테라스 옆 연못에 관한 것이다. 에미르는 300여명에 달하는 궁녀들이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큰 연못을 조성했다. 칸은 테라스에서 연못을 내려다보다가 물놀이 하던 궁녀 중 마음에 드는 이에게 사과를 던졌고, 사과를 받은 궁녀는 칸의 침소에 들었다고 한다.
부하라 순례의 마지막인 쉬토라이 모히 하사를 뒤로하고 동서로 곧게 뻗은 도로로 향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차를 타고 4시간여를 달리면 다음 목적지인 사마르칸트다. 키질쿰 사막을 따라 조성된 이 아스팔트길의 도로명은 ‘실크로드’다. 수천년 전부터 왕래하던 그 길에 포장만을 더해 그대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매끈하게 포장된 도로 양옆으로 찍어낸 듯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을 본받아 지역개발사업을 펼친 결과라고 했다. 때문에 산간과 사막, 농촌이라는 지역별 특색에 따른 가옥의 특징은 사라지고 어느 곳에나 획일화된 집들만 존재하게 됐다. 지금도 곳곳에서 지역의 전통을 간직한 고옥을 허물고 그 자리에 규격화된 모습의 새 집을 짓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실크로드를 달리는 동안 호기심을 자극한 또 하나는 테르메즈를 출발해 부하라를 거쳐 사마르칸트로 향하는 내내 도로 옆으로 노란색 파이프가 함께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란색 파이프는 큰길을 따라 이어지다 샛길이 나타나면 마치 그 길로 들어가는 입구인 양 ‘⎍’ 모양으로 구부러져 큰길을 따라 계속해 이어졌다. 마치 대동맥에서 갈라져 나온 혈관들이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있듯이 이 노란색 파이프는 실크로드를 따라 전국으로 퍼지고, 각 도시와 마을 구석구석까지 이어져있다. 노란색 파이프의 정체는 가스관이다. 천연가스 생산량으로 세계 10위권에 드는 우즈베키스탄은 이 같은 방식으로 전국에 연료용 가스를 공급한다. 가스관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그것도 수많은 자동차가 왕래하는 도로 옆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는 점이 아찔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폭발 등 이로 인한 사고는 아직까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게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고려인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은 바자르다.
이곳 실크로드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기도 하다. 구소련 시절인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18만명의 한인들이 이유도 모른 채 기차에 실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으로 이송됐다.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린 한인들은 추위를 막아줄 난방시설조차 없이 한달여를 버텨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 달리던 기차가 잠시 멈춰서면 동포의 시신을 땅에 묻고 물을 받아 밥을 해 먹은 뒤 다시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항의라도 했다가는 조용히 어디론가 끌려갔고 다시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이다. 아무것도 없는 갈대밭 가운데 버려지듯 남겨진 한인들은 갈대를 엮어 움막을 만들었다. 오직 삽과 곡괭이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물길을 내 벼농사를 짓고 목화를 가꾸며 가까스로 연명했다. 이들은 고려인 또는 카레이스키라고 불렸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고려인들은 그렇게 살아남은 유민들의 2·3세대다.
우즈베키스탄은 현재 고려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지로 분산됐다. 고려인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은 바자르(재래시장)다. 도시 어느 곳이나 바르자가 있고 그곳에서는 영락없이 장사하는 고려인을 만날 수 있다. 세월이 지나 모국어마저 흐릿해졌지만 고려인들이 파는 물건은 배추김치와 오이절임, 나물무침에서 생선자반까지 우리의 것 그대로다. ‘카레이스키 샐러드’로 불리는 당근김치는 현지인들도 즐기는 인기 식품이다. 사막의 도시 주변 곳곳에서 만난 푸른 녹지는 어쩌면 우리 동포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일궈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실크로드를 따라 놓인 수로와 농경지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495호 / 2019년 7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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