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생애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셨던 곳들: 한국의 종교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의 시조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깨닫고, 설법하시고 그리고 열반에 드신 땅 인디아, "바로 지금 여기" 에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르침을 되새겨보자. |
탄생 | |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신 것은 약 2500년 전, 히말아야의 남쪽 산 밑에 자리한 룸비니(현 네팔에 위치)동산에서 샤카족 정반왕의 장자로 탄생하셨다. 유년기와 청년까지의 시간은 카필라바스투에서 보내셨다. |
출가와 성불 | |
삶의 피할 수 없는 질곡, 생노병사를 목격하고 출가하신 싯달타는 이 질곡들은 극복할 수 있는 참다운 지혜를 알려줄 스승을 찾아 순례와 수행을 계속하였지만, 그 누구를 통해서도 그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가 없었다. 가야 부근의 동굴에서 6년 동안 극단적인 고행을 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싯달르타는 고행을 중지하고 나란자란 강을 건너 보드가야의 보리수 밑에 앉아 거짓을 벗어나 번뇌에서 자유롭게 되기 이전엔 결코 일어서지 않는다는 각오로 좌정에 들어가, 샛별이 반짝이는 새벽에 드디어 "위 없는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부처님(깨달은 자, 성불한자)이 되셨다. |
설법 | |
예로부터 수도자와 순례자들이 모이는 힌두교의 중심지인 바라나시의 북부에 위치한 사르나트(녹야원)에서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중생들에게 설법하셨다(초전법륜). 이때 제자가 된 다섯 사람을 시작으로 불교교단이 출범했다. 이후 45년간, 부처님께선 영축산과 죽림정사의 라즈기르, 기원정사의 쉬라바스티, 당시에 이미 공화국을 이루었던 바이샬리, 밤사왕국의 수도였던 코삼비 등에 머무시면서 설법을 하셨다. |
열반 | |
바이샬리에서 하안거를 보내신 부처님께서 "가죽끈에 의해 끌려가는 수레처럼 겨우 움직이는 몸"을 이끌고 북쪽으로 오르시다 중병에 걸려, 탈진 상태가 되어 열반을 맞고자 누우신 곳이 쿠쉬나가르 이다. "위 없는 깨달음"을 중득하신 후 45년이 지났고, 세상에 나오신 지 80년이 지난 후였다.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부처님의 열반을 아쉬워했던 완들이 화장된 후의 뼛가루를 나누어, 각 왕국에 스투파(불탑)를 세우고 유회(遺灰)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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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최적 방문시기 | |
10 월부터 3 월까지가 성지순례 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입니다 . 대부분의 불교성지들이 자리하고 있는 비하르 지역은 나름대로의 차이가 있는 계절적 변화가 있지만 , 한국인의 체질에 맞춘다면 10 월에서 3 월 까지가 방문 적기라 할 수 있습니다 . 더운 나라 인도지만 인도인들에게는 겨울날씨입니다. 따라서 한국여행자들에게는 우리나라 가을날씨를 연상케 합니다 . 그러나 일교차가 심한 관계로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기 때문에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점퍼 류를 준비해야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봄 , 여름에 해당하는 3 월부터 9 월까지는 날씨는 덥지만 성수기에 비해 항공료와 호텔가격이 인하되어 보다 저렴하게 다녀 올 수 있는 시기입니다 . |
일정에 관하여 | |
불교유적지를 방문하려면 최소 열흘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중생들에게 설법하시다 열반에 오른 지역을 보통 4 대 성지 ( 룸비니 - 탄생지 , 보드가야 - 성불지 , 사르나트 - 초전법륜지 , 쿠쉬나가르 - 열반지 ) 와 8 대 성지 ( 라즈기르 - 왕사성 , 쉬라바스티 - 기원정사 , 바이샬리 , 상카샤 ) 로 불리고 있습니다 . |
이동수단에 대해서 | |
인도 여행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 도시간 이동일겁니다. 넓은 땅덩어리이다 보니 보통 도시간 이동 소요시간이 평균 4-5시간 걸립니다. 게다가 더운 날씨에 열악한 인도의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백팔번뇌를 연상케 하죠.. 인도소풍과 함께 하는 성지순례는 전 일정 에어컨 버스를 이용하면서 장거리 구간일 경우에는 2AC 특급열차 또는 국내선을 이용함으로써 이동시간의 불편함과 시간을 절약하여 안락하고 쾌적한 여행의 길벗이 되어드립니다. |
숙소사정 | |
인도에는 다양한 문화만큼이나 다양한 호텔들이 있습니다 . 세계적인 수준의 딜럭스급 호텔에서부터 배낭여행자들이 머무는 게스트 하우스까지 다양하기에 여행자들의 예산에 맞추어 다양하게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 따라서 인도소풍에서는 참가자들의 취향과 선호도에 맞춰 숙소를 알선하고 있으며 현재 진행중인 성지순례의 모든 숙소는 각 지역의 최고 수준의 호텔 (5 성 호텔 ) 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 또한 룸비니에 대성석가사 , 쿠쉬나가르에 대한사 , 쉬라바스티에 금강정사 , 보드가야에 고려사 , 사르나트에 녹야원등 한국절이 설립되어 있으므로 이곳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 |
먹거리 | |
여행 중에 제일 힘든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먹거리일 것입니다 .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거늘 .. 인도음식의 강한 향과 맛에 적응하지 못하면 여행이 즐겁지 못하겠죠 !! 그러나 먹거리 역시 인도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즐거움 일 겁니다 . 따라서 인도소풍에서는 참가자들이 다양한 인도음식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며 한국의 맛이 그리울 때 현지 호텔 식당에서 직접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음으로써 건강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 또한 인도의 물 사정이 좋지 않으므로 매 일정마다 미네랄 워터를 별도로 제공하며 이동 중에 버스나 열차 안에서 인도의 신선한 과일과 먹거리를 즐거움을 더해 줄 것입니다 . |
복장과 신발 | |
11 월 중순부터 1 월 말경 까지는 인도의 겨울입니다 . 일교차가 심한 관계로 낮에는 반팔을 입고 다닐 정도로 덥지만 해가 떨어지면 따뜻한 물이 필요할 정도로 쌀쌀함을 느낍니다 . 또한 대부분의 인도 숙소가 난방장치가 안되어 있는 곳이 많기에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긴 팔 남방과 가벼운 방한복 , 윈드쟈켓 , 쇼올을 준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 신발은 쉽게 벗고 신을 수 있는 샌달 류와 간편한 운동화가 좋습니다 . 인도에서는 사원이나 유적지를 들어갈 때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덧신을 준비해 가면 편리합니다 |
불교성지 소개
룸비니 LUMBINI | |
부처님의 탄생성지. 가비라국 정반왕의 부인인 마야부인께서 출산을 위해 친정인 콜리국으로 가던 중 산기를 느껴 이곳 동산에서 무우수 가지를 잡고 뒷날의 부처님인 싯다르타를 우협으로 출산하였으며 태자를 난 지 이레만에 세상을 뜬 곳으로 마야대비 사원과 연못, 아쇼카 석주 등이 사원터와 함께 남아 있다 |
아쇼카 석주 | |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 대왕은 왕위에 오른지 20년째 석존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순례를 와 석존의 탄생지인 곳을 기려 돌기둥을 세우고 이곳 주민들에게 일반 조세는 면제하고 생산세도 낮추어 주는등의 혜택을 베푼다. 현재는 윗부분은 없어지고 몸체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
마야대비 사원 | |
아쇼카 기둥 옆에 있는 사원으로 원래는 불교사원과 탑의 자리였던 곳에 힌두 사원을 세운 것이다. 마야 부인의 해산 순간을 묘사한 희미한 상은 이 지역의 여신상으로 둔갑되어 숭배되고 있다 |
부다가야 BODHGAYA | |
성도지. 우루벨라 마을 근처의 보리수 나무 아래서 선정에 들어 7일 만에 정각을 이루신 곳으로 마하보디 대탑과 보리수, 무칠란다 연못, 전정각산과 유영굴, 니련선하, 수자타 마을 등을 볼 수 있는 불교 최고의 성지이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여 바이샬리의 아라라 가라마 선인에게서 무소유처정을 배우고, 라지기르의 우드라카 라마푸트라 선인에게 비상비비상처정을 얻으나, 이러한 가르침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적절한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서 가야를 향해 걷는다.
당시의 부다가야는 가야의 남쪽 약 11Km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서, 부처님 당시에는 신성한 땅으로 알려져 수많은 수행자들이 운집했던 곳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도 이곳 니련선하의 건너편 우르빌라 마을의 고행림에서 고행에 들었으나 쉽게 깨달음이 찾아오지 않았다.
6년 고행을 하신 끝에 극한적인 고행이 부질없음을 깨달으신 이후 니련선하 강가에서 수자타 처녀로부터 유미죽 공양을 받으시고 건강을 회복하지만, 이를 보고 함께 수행하던 교진여 등 다섯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바라나시로 떠나버린다.
부처님은 전정각산에 올라 열반의 길을 구하나 산신들의 권유에 따라 부다가야의 금강좌로 자리를 옮겨 보리수 나무 그늘 아래에 동쪽으로 자리를 정한 부처님은 바이샤카월(인도력 2월) 보름날 저녁 깊은 선정에 잠긴다. 초저녁에 천안통이 열려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업의 과보에따라 고통·변화하는 모습들이 보이고, 한밤중에 숙명통을 얻어 4성제를 깨닫고 8정도를 추구해 들어간다. 그리고 인간의 괴로움의 근본이 무명임을 간파하고 여기에서 12인연을 거쳐 고통이 생겨남을 밝힌다. 다음날 새벽 동쪽하늘에 샛별이 떠오르고 있을 때 부처님은 홀연 깨달음을 얻고 더없는 정각을 이룬다.
BC 250년 경 아쇼카왕은 금강좌의 자리에 사원을 건립하고 주위에 돌담을 조성한다. AD 5세기 경 굽타왕조에 이르러 사원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는데, 후에 힌두사원으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다시 AD 1079년 버마 왕에 의해 수리되고, AD 1157년 스리랑카 아쇼크발라 왕에 의해 다시 중수되었으나, AD 1158년 무슬림 침공 이후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1811년 버마 왕이 이곳을 방문하고 1847년 인도 정부에 사원을 중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1880년 커닝햄의 발굴 작업이 시작된다. |
마하보디 사원(Mahabodhi Temple) | |
BC 250년 경 아쇼카왕에 의해 금강좌 위에 건립된 것으로서 사방 15m의 기단 위에 높이 52m에 이른다. 사원 안에는 오른손을 늘어뜨린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
보리수(Bodhi Tree) | |
사원의 서쪽 외벽 옆에서 있는 25m 높이의 대보리수는 원래 보리수의 손자 격으로 BC 3세기 경 아쇼카왕의 딸이었던 상가미타가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 묘목을 옮겨 심었고, 다시 부다가야의 보리수가 베어진 후 아누라다푸라에서 묘목을 옮겨와 심은 것이다. |
금강좌(Vajrasana) | |
보리수 나무 아래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곳인 금강좌가 있다. 원래의 금강좌는 사원 안에 모셔져 있다고 하며, 이곳의 금강좌는 굽타왕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나마 중수작업을 통해 기단부의 여러 조각들은 없어져 버리고 좌대 부분만이 남아 있다. |
불족석 | |
금강좌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께서 첫발을 내디딘 곳에 새겨졌다는 부처님의 두 발자국이 새겨진 바위이다. |
정각후에 선정에 잠기셨던 일곱 장소 | |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은 처음 일주일 동안 금강좌에 앉아계신 채로 선정에 머무셨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을 설하셨다. 그후 부처님께서는 사원 동북쪽 언덕에서 일주일동안 보리수만을 바라보시는데 이는 나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16.7m 높이의 스투파가 세워져 있다.
부처님은 다시 사원 북쪽 담장 곁에서 일주일간 경행을 하신다. 이때 부처님께서 걸음을 내딛는 곳에 연꽃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넷째 주에는 보리수 서쪽(현 라트나그라하 사당)에서 머무르신다. 이때 부처님 몸에서는 파랑, 노랑, 빨강, 오렌지색과 흰색의 오색광명이 피오올라 보리수를 비추었다고 하며, 현재의 불교기는 이 색상을 도상화한 것이다.
다섯째 주는 사원 입구 계단을 내려간 끝 지점 반얀 나무 아래서 좌정하고 계시면서 한 브라흐만에게 법구경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 여섯째 주는 사원 남쪽의 연못 기슭에서 7일간 선정에 잠겨 계시는데, 이 연못에 살던 '무칠린다'라는 용왕이 부처님을 일곱 바퀴 둘러싸고 머리를 펼쳐 안개와 비바람, 천둥과 번개를 막아주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사원 남쪽의 라자야타나 나무 근처에서 제석천과 범천 등 모든 하늘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정에 드셨다. |
상인의 공양과 사천왕의 봉발지 | |
부처님께서는 49일간의 선정 이후 깨달음의 법을 전하고자 결심하시고 목욕을 마치시는데, 마침 '트라푸샤'와 '발리카'라는 두 상인이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에서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나 꿀에 볶은 밀을 공양하였고, 사천왕들이 땅에서 솟아올라 돌로 만든 발우를 바쳤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를 모두 포개어 하나의 발우로 만드셨다. |
아쇼카 석주 | |
아쇼카 왕은 이곳을 두 차례 방문하는데 이곳에 사원과 승원, 돌담, 석주를 세운다. 현장과 법현 이전에 이미 파괴되어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북동쪽에 코끼리 머리의 아쇼카 석주가 있었다고 전한다. 무칠린다 연못 입구에도 상단부가 유실된 석주가 남아있으나 아쇼카 석주라는 근거는 없다. |
수자타쿠티 | |
부처님께 유미죽을 공양했던 우루빌라 성주의 딸라 수자타 여인이 살았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
전정각산 | |
부다가야에서 가야 방향으로 5km 정도 이동하면서 오른쪽 강건너편을 보면 산이 보인다. 이곳이 함께 수행하던 다섯 동료가 떠나버린 후 부처님 혼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찾아 왔다는 전정각산이다. 부처님께서 이곳 산 정상부에 이르자 산신이 놀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
유영굴 | |
부처님께서 전정각산을 서남쪽으로 내려오시다가 중턱에 있는 석굴에 들어가 좌정하니 과거,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금강좌에 오르실 것을 권하였으나, 이 굴에 살던 용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기를 간절히 청하여, 부처님께서는 용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그림자를 남겨놓고 떠났다고 한다. 석굴 입구는 협소하나 굴 안은 따뜻하며 여러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
상두산 | |
가야에서 부다가야 방향으로 오른편에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이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이곳을 지나다 산봉우리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설법을 하신 곳이다 |
사르나트 SARNATH | |
초전법륜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바라나시 교외의 녹야원에서 교진여 등 5비구를 만나 중도와 사성제, 팔정도 등 최초의 전법을 하신 곳으로 물간타쿠티 사원, 다메크 스투파, 차우칸디 스투파, 사원터 등이 남아 있으며, 박물관에 소장된 부처님의 초전법륜상과 오늘날 인도의 국가문장이 된 아쇼카 석주의 사자상이 유명하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께서는 자기의 스승을 제일 먼저 떠올렸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아시고, 자신을 따르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최초의 가르침을 펴고자 약 300km를 걸어 바라나시를 거쳐 사르나트에 이르렀다. 사르나트에 이르른 부처님은 초우칸디 스투파가 있는 곳에서 마하나마 쿨리카, 다사발라 카샤파, 바드리카, 아쉬바짓, 아즈냐타 카운디냐(교진여) 등 다섯 수행자를 만나 다메크 스투파의 자리에서 이들에게 최초의 법을 설하신다. 이에 다섯 제자들은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이곳 사르나트는 녹야원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부처님 전생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날 이곳 숲에는 두 무리의 사슴이 있었는데 각각의 사슴왕들은 500마리의 사슴들을 거느렸다. 당시 바라나시의 왕이 사냥을 좋아하여 매일 사슴들을 잡아가기에 사슴의 한 왕이 바라나시 왕에게 찾아가서 매일 한 마리의 사슴을 바칠 것을 약속한다. 어느날 사슴 중의 한 마리가 차례가 되었는데 새끼를 배고 있어서 한 사슴왕에게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으나 거절 당하였다. 그 사슴은 다른 사슴왕을 찾아가서 사정을 말하자 사슴왕이 찬탄하며 대신 죽고자 바라나시 왕을 찾아갔다. 이 사연을 알게 된 바라나시 왕이 감동하여 사슴왕을 돌려보내고는 아무도 이 숲의 사슴을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이곳에서는 사슴들이 자유스럽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곳을 사슴동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초칸디 스투파 Chaukhandi Stupa | |
사르나트 박물관에서 사르나트 마을 쪽으로 3-400m 쯤의 거리에 위치한 탑으로 5세기 경 굽타왕조에 건립된 것이다. 5명의 수행자가 부처님과 만났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한 이 탑은, 무굴 제국의 악바르 황제 때 상층부에 8각으로 된 3층의 건물이 세워진다. |
다메크 스투파 Dhamekh Stupa | |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 법을 설한 장소를 기리기 위해 아쇼카왕이 건립한 탑이다. 직경 28.5m, 높이 33.53m에 이르는 거대한 탑으로, 굽타왕조에 이르러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되었다. |
아쇼카 석주 | |
사원터 서쪽에 위치하며 현재 2m 정도의 기단부만 남아 있다. 원래 모습은 높이 15.25m로 위부분에 네 마리의 사자상과 법륜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곳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윗부분의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모든 인도 화폐에 도안되어 있다. |
사원터 | |
다메크 스투파와 아쇼카 석주를 포함한 주위에는 사원과 승원터가 널려 있어 과거의 화려했던 성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 | |
규모는 작지만 인도의 어느 박물관보다 가치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녹야원의 아쇼카 석주 윗부분의 사자상이 소장되어 있으며, 세계 4대 불상의 하나로 꼽히는 부처님 초전법륜상이 소장되어 있다. 이외에도 많은 불상들이 시대별로 구분되어 전시되고 있다 |
라지기르 RAJGIR | |
최초로 불교 승단이 조직되어진 곳으로 죽림정사와 왕사성터, 법화경이 설해진 영취산, 빔비사라 왕의 길, 감옥터, 의사 지바타의 망고동산, 제1차 결집지 삽타파르니 동굴(칠엽굴), 마하가섭의 거처로 추정되는 피팔라 석실 등을 볼 수 있다.
가야로부터 3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부처님 당시 북인도의 강력한 군주국가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이었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출가 당시 우드라카 라마푸트라 선인을 만나 비상비비상처정의 가르침을 얻고, 깨달음을 얻은 후 카란다 장자가 부처님께 귀의하여 자기 소유의 베누바나(죽림원) 동산을 바치고, 빔비사라왕이 여기에 큰 건물을 지어 바쳤다. 이곳이 불교 교단의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이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사리불과 목건련의 귀의를 받는다. 부처님은 죽림정사에서 오랜 안거를 하시는데, 이곳 남동쪽에 위치한 영축산에서도 안거하시면서 많은 경전을 설하시기도 했다. 부처님 입멸 6개월 후에는 마하가섭에 의해 이곳 칠엽굴에서 500명의 비구가 모인 가운데 1차 경전 결집이 이루어진다. |
신왕사성 | |
빔비사라왕의 아들 아자타샤트루(아사세왕)에 의해 건립된 이곳은 한림(시달림:죽은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추정되는 유적지가 있다. |
베누반 비하르(죽림정사) | |
카란다 장자의 동산에 빔비사라 왕이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불교 최초의 사원으로, 현재는 몇몇 무슬림들의 무덤만이 있을 뿐, 몇 무더기의 대숲이 죽림정사의 이름을 말해줄 뿐이다. 이곳에는 작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장자의 이름을 따서 카란다 연못이라고 불린다. |
아사세왕 스투파 | |
죽림정사에서 신왕사성 방향의 오른쪽 도로변에는 부처 입멸후 8등분 된 사리의 일부분으로 아사세왕이 조성한 스투파가 있으나 기단부 외에는 모두 훼손되었다. |
데바닷타 석실 | |
온천 바로 뒤편에 옛적 석존의 조카로서 결국 석존에게 반기를 들었던 데바닷타가 선정에 잠겨있던 장소라고 하는 데바닷타 석실이 있다. |
기자쿠타(영취산) | |
석존이 라즈기르에 머물때마다 즐겨 거주하셨던 곳으로 많은 설법이 이곳에서 행해졌으며 법화경이 행해진 곳도 이곳이다. 이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걸식을 위해 이 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석존을 위해 빔비사라 왕이 닦았다고 한다. 이 길의 도중에 있는 두 개의 작은 탑을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탑은 석존을 뵈러 오르던 빔비사라 왕이 수레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 자리임을 알리는 것이고 두 번째 탑은 빔비사라 왕이 시종마저 배제하고 홀로 석존께 향했던 자리임을 알리는 것이라 한다. 아난존자 등이 석존을 모시며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작은 규모의 동굴이 정사의 터가 남아 있는 영취산 정상의 주변에 있다. |
바이샬리 VAISHALI | |
석존이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의 다섯 번째와 마지막의 하안거를 보냈던 곳이며 유마거사의 고향이며, 기녀 암라팔리의 귀의, 원숭이들의 연못과 꿀 공양 등이 있었고 부처님께서 열반을 처음으로 예언하셨으며 부처님 입멸 후에는 제2차 결집이 있던 곳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출가 당시 아라라카라마 선인으로부터 무소유처정의 가르침을 받은 곳이며 마하가섭을 제자로 맞은 곳이기도 하며 최초의 비구니 승단이 형성되어지기도 한 불교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곳 가운데 한 곳이다.
지속적인 관리가 없어 폐허가 되어가던 이곳은 1880-1881년 영국인 알렉산더 커닝햄에 의해 발굴되면서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
랏차비족들의 탑 | |
아쇼카 왕에 의해서 랏차비족들에게 나누어진 석존의 유회를 보존하기 위해서 지어진 탑이다. 아쇼카 왕은 랏차비족들의 탑에 보관되어진 석존의 유회를 여럿으로 나누어 그 중 일부는 이곳에 두고 나머지는 자신이 세운 여러 곳의 탑에 분산시켰다고 한다. |
암바라 촉 | |
석존시대 바이샬리를 무대로 생존했던 여인 암바팔리와 관계된 곳이다. 암바팔리는 석존이 바이샬리를 방문하던 어느날 석존을 찾아가 석존과 그의 일행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제의를 하였다고 한다. 허락을 받고 되돌아 가는 날 암바팔리는 석존과 일행을 대접하기 위하여 달려오던 귀족일행과 마주치게 되었다. 귀족들은 암바팔리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을 알게 되자 암바팔리에게 적당한 대가를 치를 터이니 그 기회를 양보하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에 암바팔리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설사 바이샬리 전체를 양보의 대가로 내놓는다고 하여도 석존을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양보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녀는 석존과 그 일행에게 식사를 대접한 후에 자신의 망고 과수원을 교단에 기증하였는데 후에는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
나란다 Nalanda | |
나란다는 부처님의 큰 제자 중 한분인 사리불의 출생지며, 부처님께서도 여러번 방문하셨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5세기에 세워져 7세기 무렵엔 1만명에 이르는 전 세계의 수행자들이 모였던 최대, 최고의 불교대학이 있었던 곳인데, 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고, 지금은 흔적과 박물관의 유물로만 남아있다. |
쉬라바스티 SRAVASTI | |
부처님께서 24우안거를 하셨으며 이교도들과의 대결에서 수 많은 기적을 보이시기도 하셨던 이곳은 사헤트 마헤트라 불리워지며 이곳에 기원정사를 지어 부처님께 바친 수닷타 장자의 집터와 사위성터, 앙굴리말라 스투파, 아난다의 보리수 등이 남아 있다.
부처님께서 라즈기르의 죽림정사에 머물고 계실 때, 아들의 혼인을 위해 라지기르를 방문했던 수닷타 장자가 부처님을 찾아뵙고 쉬라바스티로 초청하고는, 미리 돌아와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만한 장소를 찾아 당시 프라세나짓 왕의 아들인 제타 태자의 동산을 사려고 했다. 이에 제타태자가 자기의 동산을 사려면 금으로 동산을 덮으라고 하여, 수닷타 장자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 동산에 금을 깔게 된다. 이에 감동한 제타태자는 자신의 동산을 내어주어 이곳에 큰 사원이 건립되었다. 이곳이 기수급고독원, 즉 기원정사이다.
부처님은 이곳 기원정사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시게 되며 많은 일화를 남기시게 된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시기한 많은 모함들을 물리치고는 부처님은 쉬라바스티 동쪽 망고나무숲에서 많은 제자와 군중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신통을 보인다. 이교도들과의 신통력의 대결과, 망고의 씨를 심어 순식간에 피어오르게 하셨으며, 천분의 부처의 화현을 나투시는 등의 기적을 보여 많은 사람들을 감복시킨다.
부처님은 이곳에서 어머니 마야데비와 천인들을 위해 법을 설하려고 도리천에 오르시기도 한다. AD 407년 법현이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기원정사를 둘러싸고 98개의 가람이 있었을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
기원정사 (Jetavana) | |
현재는 모두가 폐허가 된 채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으나 애초에 이곳 기원정사는 7층의 목조 건물로 추정된다. 이곳 유적지는 457m*152m 넓이의 대지 위에 펼쳐져 있다. *아난다의 보리수 : 유적지의 중앙 부분 남쪽으로 보리수가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다가 부처님께 청하여 부다가야 보리수의 어린 묘목을 옮겨와 심은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자주 이곳에 머물면서 선정에 잠기셨다고 한다.
*코삼바쿠티(Kosambakuti) : 수닷타 장자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승원터로서 부처님께서 개인적으로 묵으실 수 있도록 지어졌던 곳이다. *간다쿠티(Gandhakuti) : 수닷타 장자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승원터로서 프라세나짓 왕에 의해 조성된 전단향 불상이 모셔져 있었던 곳이다. 애초의 기원정사라 함은 이곳을 지칭한 것이다. 7층이던 것이 화재에 의해 모두 타버리고 벽돌로 2층이 재건립되었다. |
사위성 | |
기원정사 유적지에서 북쪽으로 2km 이어진 길에 코살라국의 사위성이 있다. 이곳에서는 수닷타 장자의 집터, 앙굴리말라 스투파 등을 볼 수 있으며, 지금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
앙굴리말라 스투파 | |
앙굴리말라는 어리석음 때문에 많은 사람을 죽여 손가락을 모았지만 결국 부처님께 귀의하여 아라한 과를 얻은 희대의 살인마였다. 수닷타 장자의 집터 바로 서북쪽 5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
수닷타 장자의 집터 | |
캇치치쿠티라 불리는 이곳은 현장과 법현의 기록을 근거로 수닷타 장자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
이적터 | |
쉬라바스티에서 발람푸르 방향으로 1km쯤 오면 오른쪽으로 조그만 언덕이 있는데 이곳이 부처님께서 기적을 보이신 곳에 건립된 스투파터로 확인되고 있다.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손톱에 독을 묻힌 채 부처님 몸에 상처를 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데바닷타가 앉아있는 아래 땅이 꺼지면서 불꽃이 일고, 데바닷타는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
쿠시나가르 KUSHINAGAR | |
열반지. "비구들이여, 모든 현상은 변화한다. 게으름없이 정진하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신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신 곳으로 니르바나 사원과 사리탑, 사라쌍수, 마지막 설법지, 다비장과 라마바르 스투파 등이 남아 있다. |
니르바나 사원 | |
1956년 인도정부에 의해서 지어진 곳으로 붉은 색을 띄는 사암을 깍아서 조성한 것이다. 이곳에는 6.1m에 달하는 길이를 가진 열반상이 있는데 이것은 5세기경의 작품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석존의 마지막 모습처럼 몸의 오른쪽을 밑으로 하고 발 위에 발을 포갠 자세로 누워있다. |
열반탑 | |
니르바나 사원 뒤편에 있다. 탑이 세워진 자리는 석존이 열반하셨다는 두 사리수의 자리, 바로 그곳으로 추정된다. 처음 탑이 쌓인 이후 계속 덧붙여 쌓여 오다가 5세기경 열반당의 불상을 기증하였던 하리발라에 의하여 오늘과 같은 형태를 갖추었다. |
람바르 스투파 | |
열반당에서 1.5km 떨어진 곳인데 벽돌로 탑이 이루어져 있다. 열반에 이른 석존을 화장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옆에는 석존이 마지막으로 몸을 씻으셨다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다. |
아잔타, 엘로라 석굴 | |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 인도 불교예술의 보고 |
아잔타 | |
데칸고원의 숲을 헤치며 유연하게 흐르는 와고르 강계곡, 가에서 70m 정도 올라간 중턱은 온통 돌로만 이루어져 있고, 1.5km에 이르는 이 돌벽을 따라 29개의 불교석굴들이 줄지어있다. 1819년, 호랑이를 쫒던 건너편 언덕의 한 영국군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8번에서 12번 까지의 석굴은 BC2세기 경에 이루어진 초기 불교시대의 석굴들이고, 1,2,16번, 17번 석굴들에는 아잔타 석굴의 대표적인 벽화들이 있다. 불교설화집(자타카)의 사연들을 기초로 묘사된 불상, 보살상, 당시의 풍습 등 온 석굴을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벽화들이 이곳이 인류의 문화유산임을 실감하게 만든다. 26번 동굴의 볼수록 아름다운 열반상(와상), 웅장한 규모로 깍인 불상들과 석굴안의 탑들, 모두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
엘로라 | |
(위대한 신앙의 힘과 창조력의 집결 엘로라 석굴군) 장쾌한 경관을 즐길 수 있는 데칸 rdnjs의 길따라 구불구불 가다보면, 밋밋하게 흐른 바위산의 언저리에 자리한 34개의 석굴사원을 만나게 된다. 1번과 7번 석굴을 비롯하여 12번 까지는 불교 석굴, 13번에서 29번 까지는 힌두교 석굴 사원, 30번에서 34번 까지는 자이나교 석굴 사원들이다. 엘로라 석굴군의 압권은 16번, 카일라쉬 힌두석굴이다. 높이 33m, 넓이 47m, 길이 81m에 이르는 대규모의 이 석굴 사원이 7000여 명의 석공들을 동원하여 150년 만에 만든 것(8세기)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바위를 위에서부터 쪼아 내려오며 만들어졌다는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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