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문이란 성질을 달리하는 서로 다른 인위적인 공간을 이어주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공간의 경계지점에 담이나 벽을 쌓고 문을 낸다.
문은 열리고 닫히도록 만들어 안과 바깥을 구분짓기도 하며 사람의 출입을 견제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찰에 세워지는 일주문은 담장과 연결되지도 않으며 문짝도 없이 자연스럽게 건축한다.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째 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되었지만 일심(一心)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항상 한마음 한뜻을 가지고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봉정사의 일주문은 명옥대를 지나 언덕을 오르다 보면 서서히 지붕이 나타나고 조금 더 오르면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일주문을 이곳에 세운 까닭은 봉정사로 오르는 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다가 이곳에서 평지를 이루기 때문이다.
일주문은 자연석을 가지고 허튼층쌓기로 마무리 한 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나란히 일직선상에 세우고 그 위에 공포를 짜서 결구하고 도리를 걸친 다음 서까래를 걸어 완성시켰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측면에 풍판을 설치한 구조이다. 공포의 구조는 다포양식을 사용하였으며 처마 밑에는 '天燈山鳳停寺'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00년 현 위치에 신축하였다.
천등산 봉정사
봉정사[鳳停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82년(신문왕 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1971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672년(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한다. 또 일설에는 능인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靑馬)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志)』에, ‘부(府)의 서쪽 30 리에 천등산이 있다.’고 하였으며, 1566년(명종 21) 퇴계이황(李滉)이 시를 지어 절의 동쪽에 있는 낙수대(落水臺)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서도 계속 존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500여 결(結)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년 4월 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절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는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55호인 봉정사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봉정사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봉정사 고금당(古今堂) 등의 지정문화재와 무량해회(無量海會: 僧房)·만세루(萬歲樓)·우화루(雨花樓)·요사채 등 21동의 건물이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총 높이 3.35m의 삼층석탑이 있고, 경판고(經板庫)에는 대장경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부속암자로는 퇴락한 영산암(靈山庵)과 오른쪽 골짜기 부근의 지조암(智照庵)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봉정사 [鳳停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창건설화
은 옛적에는 대망산이라 불렀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있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불문에 들어와 대망산 바위굴에서 계절이 지나는 것도 잊고 하루에 한끼 생식을 하며 도를 닦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도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염(念)하며, 마음과 몸을 나른하게 풀어지게 하고 괴괴한 산속의 무서움과 고독같은 것은 아랑곳 없었다. 이렇게 십년을 줄곧 도를 닦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날 밤 홀연히 아리따운 한 여인이 앞에 나타나 "여보세요. 낭군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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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을 굴리는 듯 낭낭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미처 능인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보드라운 손길이 능인의 손을 살며시 잡지 않는가! 눈을 들어 보니 과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고운 살결에 반듯하나 이마와 까만 눈동자 오똑한 콧날, 거기에는 지혜와 정열이 샘솟는 것 같아 진정 젊은 능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 했다. 여인은 "낭군님" 다시 한번 맑은 목소리로 능인을 불렀다. "소녀는 낭군님의 지고하신 덕을 사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낭군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부디 낭군님을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여인의 음성은 간절하여 가슴을 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능인은 십년을 애써 쌓아온 수련을 한 여인의 간청으로 허물 수 없었다. 능인은 준엄하게 여인을 꾸짖었다. "나는 안일을 원하지 아니하며 오직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의 공적을 사모할 뿐 세속의 어떤 기쁨도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가거라!" 능인의 꾸중에 산도 크게 울리는 듯 했다. 그러나 여인은 계속 유혹을 하며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능인은 끝내 거절하였으며 오히려 여인에게 깨달음을 주어 돌아가게 했다. 여인이 돌아서자 구름이 몰려드는가 싶더니 여인이 사뿐이 하늘로 오르며 " 대사는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나는 천상 옥황상제의 명으로 당신의 뜻을 시험코자 하였습니다. 이제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사오니 부디 훌륭한 인재가 되기를 비옵니다." 여인이 하늘로 사라지자 그곳에는 산뜻한 기운이 내려와 굴 주변을 환히 비추었다. 그때 하늘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또 울려왔다. "대사, 아직도 수도를 많이 해야 할텐데 굴이 너무 어둡습니다. 옥황상제께서 하늘의 등불을 보내드리오니 부디 그 불빛으로 더욱 깊은 도를 닦으시기 바라나이다." 그러자 바로 그 바위 위에 커다란 등이 달려 어둠을 쫓고 대낮같이 굴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능인은 그 환한 빛의 도움을 받아 더욱 열심히 수련을 하여 드디어 득도하여 위대한 스님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등의 덕택으로 수도하였다하여 그 굴은 '천등굴' 대망산을 '천등산'이라 이름지어 불렀다고 한다 |
봉정사 연혁
에 따르면 '북서쪽 30리에 있는 천등산 아래에 있다. 신라시대에 이름난 절이 되었다. 가정 병인년(1566년) 봄에 퇴계 선생께서 절의 동쪽 낙수대 건물에 붙인 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在府西三十里天燈山下羅代爲名刹前有落水-------]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 중 하나인 봉정사의 최초 창건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의 창건이라는 기록과 능인대덕의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대체로 능인대덕의 창건으로 보고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능인대덕이 수도를 한 후 도력으로 종이 봉을 만들어 날렸는데,이 종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 (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 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 때는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봉정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지닌 곳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봉정사의 역사에 대하여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창건에 관한 사실도 전설에 상당한 부분을 의존하고 있고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도 몇 차례 중수한 것을 제외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전무한 편이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1972년에 실시된 극락전의 완전한 해체 복원 시에 상량문에서 발견되어 지금까지 한국에서 최고 오래된 목조 건물이 봉정사 극락전 (국보15호)으로 인정 받게 되었고 극락전의 건립 연대는 적어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2000년,2월 대웅전 지붕보수공사 과정에서 사찰 창건 연대를 확인해주는 상량문과 대웅전 내 목조 불단에서 고려말에 제작했다는 묵서가 발견되었다.
대웅전 지붕의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북서쪽 종보 보아지에서 발견된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중국연호인 선덕 10년 <1435년, 조선조 세종 17년>에 쓴 글) 라고 적힌 상량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가 직접 썼고 자사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이라는 사찰 건축연대를 밝혀주는 내용과 당시 봉정사의 사찰 규모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어 대웅전이 500여년 전에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 (지정 21년 <1361년,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시주하다.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되었다
한편 새로 발견된 상량문에는 신축, 단청을 한 시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사찰규모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초 당시 봉정사는 팔만 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결(1만여평)의 논밭에다 안거스님 100여명에 75칸의 대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험하지도 않아 잠시 바쁜 도심을 떠나 한적한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은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가진 이 곳은 우리들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하고 누구나 봉정사에 오면 심신의 피로를 다 잊어버리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등반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점차 번잡해 가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조용한 한국산중 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불교를 믿든 믿지 않든 더없이 좋은 수련의 장소이기도 하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특히, 고려태조와 공민왕께서 다녀가기도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만세루
누문은 대부분 이층으로 건축되며 아래층은 사찰의 중정으로 통하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하며, 윗층은 산사의 전망을 감상하거나 목어(木魚), 운판(雲版), 범종(梵鐘), 법고(法鼓)등을 걸 수 있는 종루(鐘樓)나 고루(鼓樓)의 기능을 겸하기도 한다.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아 가구의 노출을 방지하고 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이층 누각식 건물로 일층인 아랫부분은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츳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우하주는 누상주에서 사용한 것보다 더 굵은 부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보이며 사찰의 중정으로 오르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만세루는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 판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로서의 기능을 한다.
목어는 나무를 깎아서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을 파내어 비게 한 다음 그 속을 막대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불구이다.
염불과 독경이나 예배할 때 쓰이는 것으로 물속에 사는 고기들을 구원하고 수중중생의 해탈을 위하여 두드리는 것이다.
불사에 쓰이는 이 기구를 목어라고 이름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옛날 덕이 높은 고승의 제자 하나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속된 생활을 하다가 그만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
어느날 스승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 물고기가 나타나 전생의 죄를 참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등에 달린 나무를 없애주기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 물고기는 다름아닌 말썽을 부린 제자가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스승은 가엾게 생각하여 수륙재를 베풀어 등에 난 나무를 없애주었다.
그날 밤 제자는 스승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업보를 벗겨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고 자신의 등에 난 나무를 깍아 물고기 형상을 만들고 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듣는 수행자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게 될 것인 동시에 물에 사는 물고기들을 구원하는 소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스승은 제자의 말대로 목어를 만들고 여러 행사에 두루 쓰이는 법구로 삼았다.」고 한다.
민간 신앙에 있어서도 물고기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장석이나 노리개에 잉어 형상이 새겨지고 장농이나 소품들에도 잉어문양을 많이 사용한다.
이것은 물고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을 감지 않으므로 물고기의 속성을 따라서 도난을 방지하는 부적으로 주로 사용한다.
불교에 있어서는 수행자들로 하여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행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물고기 형상의 목어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법고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구원하고 해탈하라고 치는 북이다. 북을 받치고 있는 북대는 구름 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운판은 날아 다니는 짐승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구름의 형태로 만들어서 걸어두고 친다.
범종은 지옥에 빠진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울리는 것이다.
이상 네 가지 범종, 운판, 법고, 목어를 사물이라 한다. 누에는 '덕휘루(德輝樓)'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어 이 누문의 이름이 덕휘루였음을 알 수 있으나 언제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세루 입구에서 대웅전 부처님이 보인다
만세루 네부에 걸려있는 덕회루 현판
범종각
종을 걸어두는 누각으로 종루(鐘樓)라고도 불리 우며, 사찰의 의식도구인 사물(四物 :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걸어놓고 각종 불교의식의 시작과 끝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사용하는데 봉정사는 범종만 달아놓음.
삼층석탑
극락전의 정면에 있는 고려시대 중엽에 조성된 탑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중 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부분은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탑의 총 높이는 318cm이다.
2층 기단(基壇)을 쌓아 탑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기단에 비해 폭이 좁아진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 크기가 위로 갈수록 적당하게 줄어들면서도, 폭의 변화는 적다.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고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일부만 남아있다.
고금당(보물 제449호)
보물 제449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금당은 극락전 앞 서쪽에 세워져 있다. 이 건물은 동쪽에 있는 화엄강당과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에 의하여 건축되어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화엄강당과는 달리 기둥과 기둥의 간격이 좁고 기둥의 키가 높은 구조를 하고 있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연적으로 쌓은 축대 위에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았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공포는 익공에 가까운 주심포계이며 가구는 고주가 없는 7량가이다. 정면 3칸에는 칸마다 2짝으로 된 띠살문을 달았다.
어간 문의 크기는 중앙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어 좌우의 띠살문보다 높이가 조금 더 크다. 측면과 뒷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고 뒷면의 좌우 협칸에 외문의 띠살문을 달았다.
공포의 구성은 기둥 위에만 포작을 짜올린 주심포계 구조를 택하고 있으며 주두 밑에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 주두 위에서 나온 살미첨차를 포개 놓았다. 이 위에 도리 방향으로 일출목의 행공첨차를 얹어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는 관계로 익공계로 이해되기도 한다.
측면의 가구는 벽 중앙에 귀기둥보다 약간 긴 원형의 고주를 놓아 대들보를 받치고, 대들보 위에 짧은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쳤으며, 이 위에 다시 짧은 기둥을 세워서 마루도리를 떠받치고 있다.
도리와 장여를 길게 밖으로 빼내어서 측면 지붕에 깊이감을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엄강당에는 대들보와 마루보 사이에 조그만 살창을 두고 있지만 고금당에는 없다.
이것은 화엄강당이 판고 등으로 쓰이던 건물이어서 측벽에 살대를 꽃은 통풍창이 있는데 반하여 고금당은 선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살창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좌측면에는 아궁이를 내어 난방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내부는 3칸 통으로 공간 활용을 넓게 하였다.
극락전(국보 제15호)
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건물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극락전 해체 보수공사 때에 1625년(인조3)에 작성한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이 상량문은 '천계 5년 3월'에 중수하면서 작성한 공사 기록인데, '前中創至正 二十三年 癸卯 三月日'이라는 구절이 있다. 중창은 중창(重創)을 의미하며 지정 23년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께서 개창하였다고 상량문의 신라 때에 창건은 이를 가리킨다. 공민왕 12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은 이보다 오래 전에 이미 건물이 조영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갑석을 올리고 크기가 다른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구조이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다.
공포는 외 1출목 주심포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가구는 9량가인데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고주 2본이 뒤쪽에 있다. 그러나 평주상의 대량과 퇴량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높이로 만들어진 특색을 보인다.
다른 법당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대량은 단면이 청자매병의 윤곽을 연상시킨다. 굵지않은 목재를 홍량으로 다듬어 걸었는데 이로 인하여 중첩하는 부재가 거듭됨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맛을 덜고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에 방전을 깔고 뒤쪽에만 2개의 고주를 세워 그 사이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맞춘 뒤 다포식 구성을 지닌 지붕을 씌워 집을 마련하였다.
극락전이 지닌 몇 가지 특징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계승된 이른바 고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어 있는 점, 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첨자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에는 아미타불을 전각의 가운데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여 그 위에 봉안하고 있고 좌우 협시보살은 모셔져 있지 않다.
단지 불단에는 높이 100cm정도의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불단의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高宗)37년인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는 가로 195cm, 세로176cm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5cm폭의 흰 테두리를 두르고 중앙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그려 전체적으로는 아미타불의 관배를 감싸듯이 배치된 구도를 가지고 있다.
탱화의 표현 기법은 본존불의 경우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상체보다 두부(頭部)를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까지 들어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었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왼손은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는데 손가락 끝이 뾰족하지만 우아한 곡선미를 간직하고 있다. 광배는 원형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그렸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은 본존불을 향하여 약간 틀어 앉은 자세를 취하고 머리에는 화불(化佛)이 그려진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왼손은 연꽃 줄기를 잡고 있다.
우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칭되는 자세를 취하고 보관(寶冠)에 보병(寶甁)을 표시하고 경책을 받쳐들고 있다.
본존불의 두광 좌우에 합장한 아난과 가섭존자가 상반신만 표현되어 있고, 그 위로 화면의 여백없이 구름을 화려하게 그렸으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는 광선을 그려넣었다.
탱화하단 중앙에도 한덩이 구름을 그려서 아미타여래가 극락세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극락전(국보 제15호)
극락전(국보 제15호)
극락전(국보 제15호)
아미타불을 전각의 가운데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여 그 위에 봉안하고 있고 좌우 협시보살은 모셔져 있지 않다.
단지 불단에는 높이 100cm정도의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불단의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高宗)37년인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는 가로 195cm, 세로176cm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5cm폭의 흰 테두리를 두르고 중앙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그려 전체적으로는 아미타불의 관배를 감싸듯이 배치된 구도를 가지고 있다.
본존불인 아미타부처님
극락전의 닫집
극락전(국보 제15호)
극락전(국보 제15호)의 뒤쪽 문
안정사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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