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論山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명으로 968년경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석불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가, 이번에 고려시대 신앙과 불교조각사에 있어서의 위상을 재평가 받아 국보로 승격하게 되었다.
석불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용화회소(龍華會䟽)」를 비롯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고려 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시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고려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당대 뛰어난 조각장이 참여하여 제작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보살상은 좌우로 빗은 머릿결 위로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을 썼고 두 손으로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와 균제되지 않는 압도적인 크기 등은 한국 불상 중 가장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미의식을 창출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우아한 이상미(理想美)를 축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우리나라 불교신앙과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창성과 완전성 측면에서도 뛰어나 국보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석조관음보살상 조성에 관련된 연기설화
현 관촉사에서 동편으로 5리쯤 떨어진 사제촌에 사는 어느 여인이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반약산 서북편에 이르렀는데, 그 때 어디선가 어린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므로 찾아 가보니
인적은 보이지 않고 땅속에서 큰 바윗돌이 솟아났다. 이 때 기이하게 여긴 여인은 집에 돌아와서 자기 여서에게 절하였으며 여서는 다시 관아에 알리었다.
이에 광종은 '아국의 길조이니 불상을 조성하라는 징조이다.' 라고 하였다.
옛 절터인 반약산에서 솟아오른 대석은 관세음보살의 영이라고 믿은 광종이 이 돌을 다듬어서 불상을 조상케 하였으니 명실공히 이 불상은 관음석상이라 할 것이다.
불상을 조성키로 한 조정에서는 발로에 사자를 보내어 석장을 널리 구하였다. 이 대 혜명화상이 응모하고 나섰다. 혜명은 공장 백여명을 동원하여 관음상을 조상하니 무려 37년(광종21년(970)-목종9년(1006)만에 대불사는 완성되었다.
관촉사 : 반야산에 있다. 돌미륵이 있는데, 높이가 54척이나 된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고려 광종때에 반야산 기슭에 큰 돌이 솟아오른 것을 승 혜명이 쪼아서 불상을 이루었다 한다. 이?의 시에,
'마읍 동쪽 백여리, 시진 고을 관촉사네. 큰 석상 미륵불은 '내 온다, 내 나온다.' 하고 땅에서 솟아났단다. 눈 같이 흰 빛으로 우뚝이 큰 들에 임하니, 농부 벼를 베어 능히 보시하네. 석상에 때대로 땀 흘려 군신을 놀라게 했다 함이 어찌 구전만이랴. 국사에 실려 있다오.'
하였다.[(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3권 63쪽]
'모두 3단으로 된 이 불상은 거대한 규모의 입불로 조성되었다. 높이...55척 5촌/ 둘레...30척/ 귀의 길이...9척/ 미간 ...6척/ 입...3척 5촌/ 화광...5척/ 관고...8척/ 소개...6척 5촌/ 대개의 방광 ... 11척에 이른다.'
그리고 이 불상의 이마에 이고 있는 화불은 3척 5촌이고 손에든 연화지는 무려 11척이나 되는 대규모의 불상이다. 또한 머리 위에는 이중으로 된 보관을 쓰고 관의 둘레에는 풍어를 달았다.
이렇듯 우람한 자용의 관음상이 세워지는 과정에도 신묘한 영이가 뒤따랐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 석상은 모두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니 각 부분과 상세,하체를 모두 따로따로 만들어서 포개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하체는 낮아서 죄대 위에 올려놓는다 치더라고 그 윗부분을 올려 세우는 일이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혜명화상의 지혜로써 미치는 바가 못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강가에서 두 어린애가 노는 것을 보고 나서 비로소 쾌재를 올릴 수 있었다.
애들이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으니 즉 세 동강의 토불을 크게 만들어서 불상을 세우고 있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하체를 세우더니, 다시 흙모래를 하단 주위에 널따랗게 모아 올리는 것이었다.
평평한 지반이 만들어지니 토불의 중간부분을 끌어 올려서 먼저 세울 하체에 맞추어 조립 하였다. 다시 그 키에 맞도록 흙모래를 모아 올린다음 토불의 윗부분을 올려놓는다. 그런 뒤에 긁어 모았던 모래를 모두 파헤쳐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토불은 우뚝 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혜명은 괘재를 부르며 환희용약하였다.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온 혜명은 먼저 기단을 청초하였으며 이어서 아래서부터 차례료 올려 세우니 마침내 관음석상의 조성불사는 원만히 성취되어 회향하였던 것이다.
이 때 관음석상을 세워 마치니 문득 큰 비가 내려 석상에 묻어있던 흙모래 등이 깨끗이 씻기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관음석상의 상호는 더욱 아름답고 서기가 충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예경하는 신앙심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문이 퍼져서 참배자가 줄을 이어 성시를 이루었으므로 그 앞에 흐르는 물은 시진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우뚝 솟은 이 관음석상은 우리 겨레의 온갖 고액을 감싸주는 대비 보살상임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관음석상의 미간에 옥호광명이 휘황하여 그 서기가 하늘에 뻗쳤으니 나라가 태평할 때요, 만일 나라에 어려움이 닥쳤을 적에는 온 몸에 땀이 흐르고 연화지도 빛을 잃었다고 한다. 보국안민을 염원하는 관세음의 덕화가 아닐까.
[신증동국여지승람권3 은진불우조;관촉사사적비문 참조.]
배례석
관촉사 석등에서 약 10m 동쪽으로 떨어진 화단안에 있는 것으로,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된다.
직사각형의 받침돌 형태로,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옅게 새긴 후 그 안에 고사리 무늬 같은 버섯구름 모양을 새겨 넣었다. 윗면에는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약간 작은 연꽃 두 송이와 2개의 연줄기를 조각하였다.
조각이 정교하고 장중한 맛이 풍기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관촉사 석등(보물 제232호)
관촉사 앞뜰의 큰 석불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식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가운데받침은 각이없는 굵고 둥그런 기둥으로 세웠는데, 위아래 양끝에는 두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8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곱게 장식하였다. 2층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기둥이 빈약한 반면 창은 터무니없이 널찍하다.
각 층의 지붕들은 처마가 가볍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한 꽃 조각이 서 있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룬다.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을 두었는데, 조각이 두터워서 인지 무거워 보인다.
전체적으로 뒤에 서 있는 석불 못지않게 힘차 보이나, 화사석의 네 기둥이 가늘어 균형이 깨지고, 받침의 가운데기둥이 너무 굵고 각이 없어 그 효과가 줄어든 감이 있다.
뒤의 석불 즉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준다.
'사찰순례 > 108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산 관촉사: 일주문, 천왕문, 윤장대, 종루(17.7.16) (0) | 2018.06.21 |
---|---|
논산 관촉사: 대광명전, 미륵전, 명부전(17.7.16) (0) | 2018.06.21 |
논산 관촉사: 삼성각(17.7.16) (0) | 2018.06.21 |
강화도 전등사: 종해루, 윤장대, 대조루(16.8.9) (0) | 2018.06.21 |
강화도 전등사: 강설당, 범종각, 범종, 극락암(16.8.9) (0) | 2018.06.21 |